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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양주 최(崔)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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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주최씨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양주최씨
성씨 최(崔)
작품명
조각가 김지삼
조형물번호 90

#양주최씨

먼저 양주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높이 펼쳐 웅비하려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양주최씨 종문의 무궁한 화합과 번영 그리고 전진을 추구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양주최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양주최씨는 소벌도리공에서 원류(源流)하여 문경공(文敬公) 최억(億)이 고려조에 호부상서를 지내고 태사에 올라 공민왕 2년 서기 1353년 양주군(楊州君)에 훈봉되어 양주최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시조로부터 4세까지 고려조에 상서, 판서, 전서에 올랐습니다. 5세 집의공(執義公) 최항(沆)에게 두 아들이 있어 큰 아들 6세 문정공(文靖公) 최정안(井安)이 조선조에 한림, 정언을 거쳐 대사헌을 지내다 단종복위 운동으로 순절하니 그의 아들 최용(溶)이 황해도 안악(安岳)에 은둔하였으며, 후손들이 아홉종파(翰林·判官·通政·三水·高山·萬戶·判決事·參奉·白川公派)를 이루었죠.

작은 아들 6세 군수공(郡守公) 최정연(井涓)은 김제군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최담(潭)이 난세를 피하여 경기도 안산(安山)에 은둔하였고, 9세 독선당공(獨善堂公) 최혼(渾)은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도덕예절을 실천궁행하여 만인의 사표로 추앙 받았습니다.

네 아들 모두 학행이 고결하고 문무에 걸출하여 4 종파(湖隱·參判·進士·承旨公派)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아들 승지공(承旨公) 최홍개(弘漑)는 임진왜란에 그리고 증손 충장공(忠壯公) 최정걸(挺傑)은 병자호란에 각각 의병장으로 호국순절하여 충절의 종문을 더욱 빛냈습니다.

후손들은 안산을 중심으로 황해도 안악과 해주 그리고 전북 고창과 충남 서천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시조로부터 12세까지 봉안된 안산 선영은 안산시 향토유적 제8호와 제10호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주최씨의 인구는 4,515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Rj6t5kJiRKpXpj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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