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조형물은 가족의 첫 단계인 부모의 의미를 갖습니다. 테두리 안의 세 개의 조형물은 동양에서 말하는 완성, 안정 됨의 숫자를 상징하며 가정을 이루고 부모와 자녀들은 세상의 순리대로 안정을 갖는 기본 순리 인 것이죠. 이 조형물은 이런 상징성을 토대로 태인(시산)경씨의 안정감 있는 번창과 평안을 기원 하도록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시산경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태인(시산)경씨는 그 연원(淵源)과 유래는 멀고 깊습니다. 옛 중국 하, 은, 주 삼대시절에 은나라에서 기자가 동방을 방문함에 그를 호종하여 왔던 경여송(景汝松)이 평양에 정착하니 태인(시산) 경씨의 시조입니다.
이후 삼한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그 세손이 실전되었으며 고려조에 이르러 그 후손 문목공 경차(文穆公 磋)가 문과에 올라 추밀원부사와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고 나라에 공훈을 세우니 태산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아들 충익공 경설정(洩淨) 또한 문무양과로 조정에 나아가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고 북변으로 침입하여 온 외적을 크게 무찌른 무공으로 태산군 호를 세습하니 문목공(文穆公)을 1세조로 하고 태인(시산)을 관향으로 하는 태인(시산)경씨가 창성된 것입니다.
태산과 시산은 같은 지명으로 지금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의 옛 이름이다. 2세 충익공이 세 아들을 두니 큰 아들 경상조(祥祖)는 광록훈보국사 직제학 대사공으로 금구파(金溝派)의 파조요. 둘째 아들 좌복사공 경상(祥祿)록은 고부파(古阜派)와 해주파(海州派)의 파조이며, 셋째 아들 경록조는 성절사위훈련직제학인데 그 후손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사공 경상조의 9세손 경세양은 무과에 등제하여 병마절도사이며 시산군에 봉해졌습니다. 대사공의 12세손 경거륜은 랑천현감이요. 부모효행이 지극하여 3단지(三斷指)하였으며 당월리에 쌍계 서원을 건립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하고 현재 그 비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좌복사 경상록의 10세손 경청공(淸公)은 대명건문 황제위 좌첨의도어사였는데 건문제가 연왕으로부터 제위를 빼앗겨 이를 복위코자 죽기로 항거하다 결치박피(抉齒剝皮)의 극형으로 죽으니 건문제삼충의 한 분으로 이름이 높죠. 현재 신도비는 도어사공파 문중 선산에 재적하고 있습니다.
태인(시산)경씨가 고려 이후 조선조 초에 걸쳐 과환충절(科宦忠節)과 효행문덕으로 이름 높은 거벽들이 기라성처럼 배출되어 문무과에 등제하여 국가에 공헌하였으니 씨족의 성예를 말할 수 있지 않으랴(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시산경씨의 인구는 본관 시산 1,347명, 본관 태인 1,223 명으로 합계 2,570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