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유래에서 보듯이 시조부터 文武(문무)를 겸비하여 어떠한 어려움이나 소요를 평온하게 진정시키는 능력있는 힘찬 모습이었죠. 이 조형물의 왼쪽은 文(문)의 상징인 책모양이며 충·효·예의 기상을 세 줄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른쪽은 武(무)의 상징인 무기로 화살모양을 단순화 하였죠. 앞부분의 사각은 방패를 표현하여 조화를 이루는 두 기둥은 강력한 문무의 기상이며 밑 부분과 유래비문 원판은 안정과 화합의 근원으로 조형의 미를 갖추어 평화와 안녕을 이루는 繁榮(번영)의 모습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공주공산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公州(公山)이씨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조 박혁거세 왕 5년 18세 때 아우 이홍일(李弘一)과 문장으로 선택되어 중국에 들어가 중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공주(公主)와 혼인하였습니다. 벼슬이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라 흉노를 정벌한 공훈으로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환국하니 곧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무공(文武公)이죠.
그 아우 이홍일도 대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입니다. 시조가 공산군이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공산(公山)으로 쓰며 공산지방에 세거하였죠. 고려 초기에 지명이 공주(公州)로 바뀌면서 관향을 공주로 쓰게 되었고 관향을 공주(公州) 또는 공산(公山)으로 쓰고 있으나 다 같은 일가이죠.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군 후 상 시(君 侯 相 諡)가 많이 배출하니 정승(政丞)이 13명이고 군(君)을 봉함이 21명이며 문자(文字)시호가 8명이 있습니다. 충자(忠字)시호가 7명이며 후(侯)작위를 받음이 6명이니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삼한갑족의 대성입니다.
특히 31세 이송령(松齡)은 이부상서 정양공(睛襄公)이고 그 아우 이백령(柏齡)이 양산군 충민공(忠敏公)에 양산이씨(陽山李氏)로 분관되었습니다. 34세 이교송(喬松)은 문하평장사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이고 그 아우 이자송(子松)이 첨의정승 수성부원군에 수원이씨(水原李氏)로 분관되었습니다.
39세 이엽(曄)의 여섯 아들 이명선(明善)은 경력공(經歷公)파, 이명성(明誠)은 문성공(文成公)파, 이명덕(明德)이 공숙공(恭肅公)파, 이명보(明保)는 지평공(持平公)파, 이명윤(明尹)이 참의공(參議公)파, 이명의(明義)는 현감공(縣監公)파, 이서(曙)의 아들 이부(敷)는 강양공(剛襄公)파로 7종형제가 분파되었습니다.
시조로부터 중세조이하 금세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가 분명하고 문중 유래비 뒷면의 가문을 빛낸 주요인물과 같이 충절과 명신 도덕 문장과 효열의 대를 이어 왔습니다. 그 후손은 위대한 조상의 빛나는 얼을 이어 받아 명문가문의 무궁한 번영(繁榮)과 발전이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공주이씨는 30,908명, 공산이씨는 11,684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