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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강릉 김(金)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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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강릉 김(金)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강릉김씨
성씨 김(金)
작품명 역사와 나
조각가 이재영
조형물번호 87
먼저 강릉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강릉김씨의 조형물 ‘역사와 나’ 는 뿌리공원의 근본취지에 걸맞게 구상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조형물을 멀리서도 고서의 형태를 인지하고 강릉김씨의 역사와 뿌리를 연상케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까이에서 작품을 감상 할 때에는 강릉김씨의 유래문을 볼 수 있어 이를 통해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강릉김씨의 유래와 선조들의 뿌리를 인지할 수 있죠.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을 상징하는 왕관과 알천을 통하여 겸손한 선조의 정신을 알리고 후손들이 자신의 성씨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작품을 수직적으로 배치하여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성씨 조형물의 가교적인 역할을 상징하였죠. 조형물 중심에 위치한 알천줄기를 표현한 부분은 시조의 정신과 후손의 화합 결속을 의미하였습니다. 펼쳐진 고서는 현재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며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강릉김씨의 활동력을 표현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강릉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시조 명주군왕은 신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 대보공의 21세손으로 신라 37대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서기 785년에 승하하여 당시 시중 겸 병부령인 주원(周元)공을 왕위에 오르도록 군신회의 에서 결의했죠.

그러나 주원공의 저택이 경도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자 인군(人君) 자리는 잠시도 비울수 없다 하고 당시 상대등인 김경신(金敬信)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신라 38대 원성왕입니다.

주원(周元)공이 비가 개인 후 임상(臨喪)차 단기(單騎)로 입궁(入宮)하니 왕위에 오른 김경신(金敬信)이 주원(周元)공에게 왕위(王位)에 오르기를 권(勸)했습니다. 하지만 주원공은 인군대위(人君大位)는 천명(天命)이라 하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로 퇴거했죠.

그로부터 2년 후 원성왕은 왕위를 양보한 덕을 생각해 명주(강릉)를 중심으로 강릉, 울진. 평해, 삼척 등 동해안 일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하고 명주군왕으로 봉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명주도성을 중심으로 세습통치 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강릉김씨로 득관 하고 명문거족의 발상지가 되었죠.

가문을 빛낸 후손으로는 조선 세조의 패륜에 저항하며 절의를 지킨 생육신으로 <금오신화><매월당집><십현담요해> 등의 명작을 남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등이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강릉김씨는 179,593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E4efO4GPJSThhcJ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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