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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남양 홍(洪)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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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남양 홍(洪)씨(천하)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남양홍씨(천하)

성씨 : 홍(洪)
작품명 : 화합(和合)
조각가 : 홍성도
조형물번호 : 41

먼저 남양홍씨(천하)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화강암 좌대위에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문중의 선비정신과 진취적인 자세 그리고 화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죠. 여러 문중이 화합을 상징하는 원을 받치고 있는 형상과 중간의 검정색돌로 향하는 진취성을 표현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양홍씨(천하)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남양홍씨의 선(先)시조 단학사공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 영유왕의 초청으로 이 나라의 문물을 깨우치기 위해 당나라에서 왔다가 후에 정착한 곳이 당성(唐城) (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이니 때는 삼국통일 직전이죠.

당성은 당나라와의 교통의 요지로 삼국이 서로 탐하여 다투던 곳인지라 홍천하는 환난을 벗어나 잠시 지리산 동쪽 덕산 땅으로 옮겼습니다. 이 때 신라조정에서 공의 큰덕을 기려 덕산촌주를 봉하고 국사(國師)로 예우하였죠. 그후 당성을 다시 쌓고 홍천하를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함에 대대로 이를 이어내려왔죠.

당성홍씨는 신라귀족의 반열에 서서 이 땅의 문물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이후 고려가 개국할 때 시조 홍은열(洪殷悅)은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 태사(太師)가 되었죠.

5대손 충평공 홍관(灌)은 고려 제1의 충신이자 명필로써 보문각 태학사로 경학을 강론한 탁월한 철학자입니다. 다시 그 5대손 광정공 홍규(奎)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고 서울을 강화에서 개성으로 옮겨 고려의 왕권을 다시 세운 공신이죠.
그의 종형 충정공 홍자번(子蕃)은 수상을 여러차례 역임하면서 원의 압정을 막아내려 노력하다가 끝내는 원나라의 연경에서 순절한 충신입니다.

광정공 홍규(奎)는 두 딸(충선왕비, 충숙왕비)의 국혼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익주(당성)을 남양부로 승격, 광정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양홍씨가 되었죠. 이후 고려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조가 들어설 때 잠시 큰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태조가 큰 뜻을 이룬 후에는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교로서 태사공 홍은열의 후손은 누구나 다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일에 부릴수 없도록 엄한명을 내렸으니 이는 그후, 역대 조정에서 추인받았죠.

조선조에만 남양홍문에서는 무려 300여명의 대과 급제자와 10여명의 상신, 수많은 재상과 학자, 충의절사가 배출되어 자랑스런 문벌이 되었으니 이를 일컬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하죠. 이처럼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조,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항상 역사의 주역으로 예를 존중하며 인류의 도리를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아 질서를 다듬는 선비정신에 투철하였던 선조들의 유훈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남양홍씨(천하) 후손들은 언제나 확고한 소명의식으로 나라와 가정을 충실히 가꾸어 보람차고 밝은 사회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양홍씨(천하)는 2015년도 통계청 인구조사 기준으로 487,488명으로 성씨본관별 순위 중 16위였습니다.
 

https://youtu.be/kbkn2VCdoVQ?si=2lHw03FmUAqUu-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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