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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흥 민(閔)씨의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을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여흥민씨
성씨민(閔)
작품명忠孝
조각가최 영 근 (한남대학교응용미술과교수)
조형물번호38
먼저 여흥민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외형의 門자 모양은 성(姓)자를 표현한 것으며 중앙부위의 竹筍(죽순) 및 文자 모양과 좌대의 서책모양은 先祖들의 崇尙(숭상)하시었던 학문과 행실, 충절과 신의 를 교육의 指標(지표)로 삼은 四敎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여흥민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우리겨레는 고래로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도덕을 숭상하고 절의를 존중 하여 왔으며, 어질고 착하고 예의 바른 민족으로서 東方仁國을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 閔門의 조상들은 여러 가지 미덕과 양풍을 이어받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 하면서 연면하게 이나라를 빛내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여왔죠. 빛나는 공적을 세운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로 충절활동을 소개하여 후세의 교훈이 되며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여흥민씨의 본관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의 옛 이름이며 여흥단본으로 통하고 있죠. 시조는 고려때 尙衣奉御(상의봉어)를 지낸 민칭도(稱道)입니다.
여흥민씨는 조선왕조 때 네분의 왕비를 배출하였죠. 태종비 元敬王后(원경왕후), 숙종비 仁顯王后(인현왕후), 고종황제비 明成皇后(명성황후), 순종황제비 純明皇后(순명황후) 등 입니다. 원경왕후는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이며, 인현왕후는 예의 바르고 정숙하신 분이며, 명성황후는 기울어 가는 왕조와 나라를 위하여 勞心焦思(노심초사) 정성을 다하신 분이죠.
고려조가 망하자 절개를 지켰던 杜門洞(두문동) 諸賢 가운데 민씨로는 安富(안부) 농은공, 普文(보문) 소윤공, 愉(유) 여흥군 세분이 있죠. 임진왜란 때는 汝雲 (여운) 仁老(인로)등 의병장들과 호성공신 希騫(희건) 여원군을 위시하여 많은 민문종족이 용감하게 왜적과 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성(垶) 충민공과 그의 아들 3형제등 가족13명이 모두 순절하였으며 경상 우병사 영(柡) 충장공도 순절하였습니다.
한말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泳煥(영환) 충정공은 백관을 이끌고 궁궐에 연좌하여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국민에 고하는 애절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순국하였죠. 뒤에 그 혈의를 두었던 곳에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마루의 틈새로 돋아나와 푸르고 늠름한 모양을 띠었으니 그것을 血竹(혈죽)이라고 합니다.
한말과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충정공 이외에도 肯鎬(긍호), 宗植(종식)등 의병장들과 致道(치도), 弼鎬(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하거나 옥사하였으며 혹은 만주벌판과 중국광야에 서 風餐露宿(풍찬노숙)하면서 일편 단심 겨레의 생존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 하였으니 그 우국충정을 길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父母孝養(부모효양)하고 見善必行(경선필행)하며 患難相救(환난상 구)하고 隣里和同(인리화동)하던 옛 미풍을 오늘에 되살려 국가사회 발전의 一翼 (일익)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선조의 거룩한 大義를 밝혀서 百世淸風(백세청풍)의 아름다운 良俗이 이어지고 도덕정신 發揚(발양)되도록 하자고 하는 뜻에서 이 조형물을 세웁니다. 1997년 9월20일여흥민씨 대종중 유래비 글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여흥민씨는 159,522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nZn6ORjtFc0?si=wBbj14_sqGAxzO1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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