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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천목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사천 목씨
성씨 목(睦)
작품명 화목(和睦) 그리고 탄생(誕生)
조각가 김 지 삼
조형물번호 22
#사천목씨
먼저 사천목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사천 목씨
성씨 목(睦)
작품명 화목(和睦) 그리고 탄생(誕生)
조각가 김 지 삼
조형물번호 22
#사천목씨
먼저 사천목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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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1
이 작품은 두 사람의 형태가 마주보는 것은 사천목씨의 문중에 화목한 가운데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함께함을 나타냅니다. 별의 형태는 목씨 문중의 후손들이 찬란하게 빛나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가운데 밝은 원은 목씨의 후손들이 미래를 이끌어 갈 등불이 되고, 영원토록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사천목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사천 목씨(睦氏)는 선대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화목 · 돈독하여 화목할 목(睦)자로 성을 얻게 되었고 본관을 사천(泗川)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가 본관이 서로 다르나 목씨의 본관이 사천 하나뿐인 것은 그 뿌리가 한 분에게서 어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죠.
목씨의 시조는 고려조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정 벼슬을 지낸 목효기(孝基)이고, 2세 합문지후를 지낸 목덕창(德昌)은 고려 원종10년에 서북방면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순국하시어 충신일등(忠臣一等)으로 영주군(靈州君) 에 봉해졌습니다.
3세 목준평(俊平)은 비서성판사(秘書省判事), 보문각직제학을 지냈습니다. 우리 목문(睦門)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인재를 배출하여 당당히 명문가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 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내에 단비(壇碑)로 모시고 있습니다.고려조에서 무신가문(武臣家門)으로 성망이 높았던 우리 목씨는 단본(單本) 이라 사람수는 적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정승판서를 비롯하여 당상관 21명을 배출함으로써 명문대가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니 이는 사천목씨 문중의 큰 자랑입니다.
특히 11세조 현헌공 목세평(世枰)은 중종때 명현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 두일당공(逗日堂公) 은 대사간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내고 선조 25년 77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영의정의 증직과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또 그의 아들 수옹공(睡翁公) 목내선(來善)은 이조, 호조, 예조, 형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고 숙종14년 7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죠. 기로소(耆老所)는 반드시 문과급제를 거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만이 들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 기구이며,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든 가문은 조선조 500년동안 유독 우리 목문만 갖고 있는 자랑입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사천목씨는 8,713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사천 목씨(睦氏)는 선대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화목 · 돈독하여 화목할 목(睦)자로 성을 얻게 되었고 본관을 사천(泗川)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가 본관이 서로 다르나 목씨의 본관이 사천 하나뿐인 것은 그 뿌리가 한 분에게서 어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죠.
목씨의 시조는 고려조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정 벼슬을 지낸 목효기(孝基)이고, 2세 합문지후를 지낸 목덕창(德昌)은 고려 원종10년에 서북방면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순국하시어 충신일등(忠臣一等)으로 영주군(靈州君) 에 봉해졌습니다.
3세 목준평(俊平)은 비서성판사(秘書省判事), 보문각직제학을 지냈습니다. 우리 목문(睦門)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인재를 배출하여 당당히 명문가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 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내에 단비(壇碑)로 모시고 있습니다.고려조에서 무신가문(武臣家門)으로 성망이 높았던 우리 목씨는 단본(單本) 이라 사람수는 적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정승판서를 비롯하여 당상관 21명을 배출함으로써 명문대가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니 이는 사천목씨 문중의 큰 자랑입니다.
특히 11세조 현헌공 목세평(世枰)은 중종때 명현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 두일당공(逗日堂公) 은 대사간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내고 선조 25년 77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영의정의 증직과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또 그의 아들 수옹공(睡翁公) 목내선(來善)은 이조, 호조, 예조, 형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고 숙종14년 7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죠. 기로소(耆老所)는 반드시 문과급제를 거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만이 들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 기구이며,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든 가문은 조선조 500년동안 유독 우리 목문만 갖고 있는 자랑입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사천목씨는 8,713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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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1
https://youtu.be/0U_diJTERVs?si=WKNGrvbD9cZKDy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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