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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나주 정(丁)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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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주 정(丁)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나주정씨
성씨 정(丁)
작품명 화합(和合)과 번영(繁榮)
조각가 정 해 덕 (홍익대학교 조소학과 졸업)
조형물번호 21

먼저 나주정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나주정(丁) 성씨 한자형태를 위주로 하여 왼쪽 구의 형태는 조상의 얼을 표현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후손들이 조상의 얼을 떠 받드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죠. 기본형태는 탑의 형태를 띠며 후손들의 화합과 번영을 표현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나주정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나주정씨의 본관은 처음에 압해(押解)였습니다. 압해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으로, 고려초에는 나주에 속한 현이였으나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모두 나주로 철수하여 한때 무인도가 되자 조선조 태종 9년(1409년)에 이르러서는 폐현이 되었죠. 이러한 연유로 나주정씨는 한동안 관적을 나주압해정씨로 쓰다가 영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나주로 본관을 고쳐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을 시조로 모신 나주 정씨는 그로부터 6세 이르기까지 압해현의 토성(土姓) 호족으로 거주하다가 7세 손 정원보(丁元甫)에 이르러 비로소 개경(開京)으로 이주하였죠.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정수강(丁壽崗)은 성종 때 병조참판으로 문장이 뛰어나 후세에 월헌집(月軒集)을 남겼고, 아들 정옥형(丁玉亨)은 명종때 좌찬성에 올라 금천군으로 봉군되고, 시호는 공안(恭安)입니이다.

그의 아들 정응두(丁應斗)역시 좌찬성으로 시문에도 뛰어난 선비였고 금계군으로 습봉(襲封)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죠. 그의 정윤조(丁胤祚), 정윤희(丁胤禧), 정윤우(丁允祐), 정윤복(丁胤福) 네 아들 또한 모두 지방관찰사, 대사헌 등 고관을 지냄으로써 당시 수도 한양에서 명망 높은 가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숙종 때의 정시한(丁時翰)은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성리학을 깊이 닦아 큰 학자가 되어서 우담집(愚潭集)을 남겼고, 영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정범조(丁範祖)는 문학에도 뛰어난 해좌집(海佐集)을 남기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세인이 익히 아는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형조 참의까지 지냈으나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에서 1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 500여권의 권위있는 저술을 남겼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나주정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조선왕조에서 무려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9대 옥당(玉堂)의 가계를 이루었음은 참으로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죠.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나주정씨의 인구는 총 37,888명으로 파악되었습니다.
 
 

https://youtu.be/oTt1GzX-lLA?si=IX8WHfIKMje-Q5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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