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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영광 김(金)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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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광 김(金)씨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영광김씨
성씨 김(金)
작품명 기원
조각가 윤상욱
조형물번호 129

먼저 영광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영광김씨의 시조인 김심언을 조형성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심언(審言)의 깊은 뜻을 되새기며 학문의 번영과 문중의 발전을 이미지화 하였죠. 작품의 전체적인 형상은 서예 붓을 의미하는 것으로 학문을 통한 후손의 발전을 상징합니다.

중앙 쪽의 유선형의 형태는 내리천의 물줄기를 표현한 것으로 조상들의 정기를 이어 받으라는 의미이죠. 또한 위쪽에 V자 형상은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영광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영광김씨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殷說)의 손자 문안공(文安公) 김심언(金審言 953~1018)이 시조(始祖)입니다. 고려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보궐 겸 기거주(起居注) 벼슬에 오르고 왕에게 봉사(封事) 이조(二條)를 올려 바른 관리의 도리를 밝혀 국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명신(名臣)이자 대유학자(大儒學者)였죠.
목종조에 주목(州牧)이 되고 현종조에 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 서경유수 등을 지내고 영광군(靈光君)에 봉해졌으며, 사후에는 문안(文安)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손들은 4대가 연이어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명문거족으로 성장하던 중 7세손 간의대부 동북면 병마사 보당(甫當)이 무신(武臣)의 난으로 축출된 의종왕을 복위시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멸문의 화를(1173) 당하고 말았죠.

이후 130여년간의 실전기(失傳期)를 거쳐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후손들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중시조를 세워 부활하였는데 경파, 영광파, 장흥파, 고창파, 양사파, 강계파, 갈산파, 대사헌파 등 여덟개파와 북한에 주달파, 서정파, 두개 파가 있습니다.

후손들은 고려 말과 조선조에서도 충의효열(忠義孝烈)로 조상의 전통을 이었죠. 문안공(文安公)을 모신 사우(祠宇) 기천사(岐川祠)는 조선조 영조(1748)대에 전남 영광읍 월평리에 모셔진 후 매년 음력 2월 15일과 9월 15일에 호남의 유림과 전국의 후손들이 각각 모여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영광군민의 총의로 세운(1987) 문안공(公)의 동상(銅像)이 군내 삼학 공원 안에 건립되었습니다.
근래에 후손들은 전국 대종회(大宗會)를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후손들 중에서도 인재(人才)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어 가문의 장래가 한층 발전의 여지가 많습니다. 영광김문의 뿌리와 힘찬 비상(飛上)을 여기 금석(金石)에 새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합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영광김씨는 37,885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GLS0-7weeqM?si=IAsgNIAInNUtwK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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