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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주조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양주 조씨
성씨 조(趙)
작품명 충효단忠孝壇
조각가 이영섭
조형물번호 125
#양주조씨
먼저 양주조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양주 조씨
성씨 조(趙)
작품명 충효단忠孝壇
조각가 이영섭
조형물번호 125
#양주조씨
먼저 양주조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충효단은 양주조문이 배출한 충절과 효자를 표현한 상징물입니다.
국력이 약했던 근대 한국 대한제국이 1905년 일본국에 의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제국 원임의정 대신 충정공 조병세 선생이 충정공 민영환 선생 등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토록 고종황제께 상소하였으나 비답이 없고 일본군헌병에게 저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비분강개하여 황제께 상소하고, 국민과 주한 각국 공사에게 호소문을 남기고 순국한 선열의 뜻을 국민들이 알아야 할 한국의 근대사를 작품에 담은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양주조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양주조씨(楊州趙氏)의 근원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인데 선계는 실전되어 상고 할 길이 없습니다. 시조로 모시는 조잠(趙岑)은 고려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를 증직받은 판원사공인데 조지말(趙之末)의 후손으로 조군우(君佑)의 손자 조경질(景質)의 아들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주조씨는 판원사공 1세조 조잠과 2세조 호판공 조인필(仁弼) 3세조 서운관정공(書雲觀正公) 조의(誼)로 3대에 이르기까지는 독신으로 선계가 이어 왔습니다.
서운관정공 조의(趙誼)는 고려조 충신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가 정평공(靖平公) 조계생(趙啓生)이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강화공(江華公) 조유중(趙惟中)이 강화부사 불가(佛家)로 귀의한 조설우대사(趙雪牛大師),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이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제학공(提學公) 조종생(趙從生)이 병조참판 제학을 지냈는데 5형제의 아들중 문강공 조말생(末生)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양주조씨(楊州趙氏)중 다수의 후손인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평공(靖平公)은 아들 병조판서 조극관(克寬), 평안도관찰사 조수량(遂良), 제학공(提學公)은 아들 병기녹사 조번(藩)과 손자 조계동(季同), 조향동(香同), 조귀동(貴同) 등이 조선 단종조 계유정난때 목숨을 잃어 후손의 인구가 적습니다.
양주조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 97인, 무과급제 71인, 생원진사 244인, 상신 8인, 대제학 5인, 인조장열왕후(仁祖莊烈王后)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국구 1인, 의빈 2인, 청백리 1인, 충절 13인, 효열 32인, 재상급 26인을 비롯하여 천여명의 관료가 나온 조선시대를 통하여 명문벌족으로 이름을 얻은 가문입니다.
특히 1905년 대한제국 때 을사늑약을 반대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한 원임의정대신 충정공 조병세 선생은 양주조문(楊州趙門)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입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주조씨의 인구는 29,631명이었습니다.
양주조씨(楊州趙氏)의 근원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인데 선계는 실전되어 상고 할 길이 없습니다. 시조로 모시는 조잠(趙岑)은 고려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를 증직받은 판원사공인데 조지말(趙之末)의 후손으로 조군우(君佑)의 손자 조경질(景質)의 아들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주조씨는 판원사공 1세조 조잠과 2세조 호판공 조인필(仁弼) 3세조 서운관정공(書雲觀正公) 조의(誼)로 3대에 이르기까지는 독신으로 선계가 이어 왔습니다.
서운관정공 조의(趙誼)는 고려조 충신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가 정평공(靖平公) 조계생(趙啓生)이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강화공(江華公) 조유중(趙惟中)이 강화부사 불가(佛家)로 귀의한 조설우대사(趙雪牛大師),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이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제학공(提學公) 조종생(趙從生)이 병조참판 제학을 지냈는데 5형제의 아들중 문강공 조말생(末生)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양주조씨(楊州趙氏)중 다수의 후손인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평공(靖平公)은 아들 병조판서 조극관(克寬), 평안도관찰사 조수량(遂良), 제학공(提學公)은 아들 병기녹사 조번(藩)과 손자 조계동(季同), 조향동(香同), 조귀동(貴同) 등이 조선 단종조 계유정난때 목숨을 잃어 후손의 인구가 적습니다.
양주조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 97인, 무과급제 71인, 생원진사 244인, 상신 8인, 대제학 5인, 인조장열왕후(仁祖莊烈王后)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국구 1인, 의빈 2인, 청백리 1인, 충절 13인, 효열 32인, 재상급 26인을 비롯하여 천여명의 관료가 나온 조선시대를 통하여 명문벌족으로 이름을 얻은 가문입니다.
특히 1905년 대한제국 때 을사늑약을 반대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한 원임의정대신 충정공 조병세 선생은 양주조문(楊州趙門)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입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주조씨의 인구는 29,631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fl4oMk_ea5Nu6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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