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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장흥 위(魏)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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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장흥 위(魏)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장흥위씨
성씨 : 위(魏)
작품명 : 선조의 혼(魂)
조각가 : 류 훈
조형물번호 : 119

먼저 장흥위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장흥 위(魏)씨 선조들의 유서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세련되게 재구성한 작품이죠.
전체적 형태는 한글 ‘위’자를 모태로 직선과 곡선의 통일된 조화 속에 문중의 화합(和合)을 의미합니다. 우측의 기둥은 문중의 비상을, 상단의 원은 충효의 정신과 문중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장흥위씨의 연원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위씨(魏氏)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필고(畢高)의 후예 필만(畢萬)이 진(晋)나라 헌공(獻公)의 참승(參乘)으로 곽, 적, 위 세나라를 멸(滅)한 공으로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르고 위지(魏地)를 봉토받으면서 지명에 따라 위씨(魏氏)로 성을 바꾸니 그가 시조(始祖)가 된 것이죠.

이제 한국의 위씨(魏氏)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시조 회주군(懷州君)은 대당관서(大唐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이름은 위경(魏鏡)이다. 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 7년 서기 638년 신라왕의 요청에 의하여 당태종(太宗)이 8인의 도예사(道藝士)를 파견함으로써 동래(東來)하였다고 하죠.

시조 위경(魏鏡)은 방(房)·홍(洪)·목(睦)·기(奇)·은(殷)·길(吉)·봉(奉)씨와 더불어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고당성(古唐城) · 익주(益州) · 남양(南陽)에 입국했고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학사(八學士)라고 불렀죠. 시조 위경은 신라 조정으로부터 아찬(阿飡) 벼슬까지 오르며 문화사절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고려 충선왕때 위경은 회주군(懷州君)으로 봉(封)해졌죠. 회주(懷州)는 지금의 장흥(長興)입니다. 그러나 약 300년간의 세계 실전으로 고려 초기 대각관 위창주(菖珠)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죠.

5세 위계정(繼廷)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숙종·예종 등 4조에서 삼중대광,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이부사, 상주국 등을 역임했으며 충렬
시호와 함께 예종 묘정에 배향됐습니다. 또한 고려 고종 때 위원개(元凱)· 문개(文凱)· 신개(信凱) 3형제는 예부시에 장원급제했죠. 위원개는 한림학사 추밀원부사로 활동하다 출가하여 정혜사에 있을 때 원나라 황제에게 청전표를 올려 송광사의 징발된 토지를 회복시켰죠. 그가 입적하자 충렬왕은 원감국사 시호를 내렸습니다.

조선조에 합문판사였던 위충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불복하였다 하여 출사자가 200년간 없었으나 그 후 부터는 문·무과 급제자가 배출되었죠.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는 호남모곡도유사 위대용(大用)은 형조참의에, 위덕의(德毅)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죠. 해남현감 위대기(大器)는 호서수군절도사에, 언양현감 위덕화(德和)는 호조판서에 의주부윤 한량(漢良),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위창조(昌祖)는 호조참의 등 무공이 지대하죠. 또한 호남 실학의 거목, 옥과현감 위백규(伯珪)는 90여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장흥 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 무과 급제자 21명을 배출하였죠.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다전등 언덕에는 장흥 위씨 시조 등 5현조(五顯祖)의 위패를 모신 하산재(霞山齋) 사호 명칭을 회주사로 변경했죠. 이곳 회주사에서는 매년 5월 첫 일요일이면 전국의 종인들이 모여 5현조(시조 위경, 중시조 위창주, 5세 위계정, 14세 위충, 15세 위덕룡)에 대한 향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D-6SbQs_950?si=4lQA_pNm5RubXR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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