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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주 최(崔)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전주최씨
성씨최(崔)
작품명
조각가천 종 권
조형물번호59
먼저 전주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조형물은 전주최씨 문충공 군옥(群玉)시조와 六세인 위정공 완산부원군 정남대장 칠석(七夕)의 훈공과 八세인 충익공 완산부원군 만육(晩六) 양(瀁)의 충신은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선양하자는데 있다
그럼 이제 전주최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전주최씨 시조 문충공 군옥(群玉)은 고려 선종조(宣宗朝)에서 추밀원 지사, 진현관 대제학을 지냈다. 서기 1086년 중국 송(松)나라 철종(哲宗)때 하례사신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그 곳의문하시랑으로 천거되어 봉직하였다.
그 후 환국하여 완산 부원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조 이하 6세까지 부원군이 다섯(5)분이나 되는 명문거족이었다.
6세(六世)인 위정공(威靖公)의 이름은 지(池)요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중연(重淵)이고,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사명(賜名)은 칠석(七夕)이다.
정남이라는 훈장을 받아 정남 장군이라고도 칭한다.칠석(七夕)장군은 1390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 7월7일이어서 칠석(七夕)이란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오위 도총관, 서북면 도지휘사에 봉직 완산부원군에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8세(八世)인 최양(崔瀁)의 자(字)는 백함(伯函)이며 호는 만육(萬六)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질인 만육은 서기1351년에 탄생하여 1424년에 서거했다.
두문동 72현(杜門洞七二賢)의 한 분인 만육은 39세에 고려 문하 찬성사보문각 대제학에올랐다. 그러나 1392년 4월 포은이 선죽교에서 장절하자 전북진안 중대산(팔공산) 을 찾아 3년동안 은둔했다.
이태조가 영상의 자리에 불렀으나 불응했고 전록(田祿) 8백결도 사양하여 오직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지키기 위하여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전북진안군 백운면에 있는 유허비각인 구남각이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어린이 회관 향토 문화관에는 만육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성계가 저작하고 세종이 계술하여 규장각에 비치하고 만육후손에게 한 권을 준 유명한 금감록이란 책은 오늘도 보존되어 있다.
만육선생 유시晩六先生 遺詩
고려국(高麗國)이 망(亡)하니
불사이군(不事二君) 하시고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셔
충신(忠臣)의 길 지키셨으니
그 충절(忠節)은 일월(日月)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니
우리 그 후예(後裔) 됨을 자랑삼아
높으신 뜻 세세손손(世世孫孫) 계승(繼承)하리라.
성씨최(崔)
작품명
조각가천 종 권
조형물번호59
먼저 전주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조형물은 전주최씨 문충공 군옥(群玉)시조와 六세인 위정공 완산부원군 정남대장 칠석(七夕)의 훈공과 八세인 충익공 완산부원군 만육(晩六) 양(瀁)의 충신은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선양하자는데 있다
그럼 이제 전주최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전주최씨 시조 문충공 군옥(群玉)은 고려 선종조(宣宗朝)에서 추밀원 지사, 진현관 대제학을 지냈다. 서기 1086년 중국 송(松)나라 철종(哲宗)때 하례사신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그 곳의문하시랑으로 천거되어 봉직하였다.
그 후 환국하여 완산 부원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조 이하 6세까지 부원군이 다섯(5)분이나 되는 명문거족이었다.
6세(六世)인 위정공(威靖公)의 이름은 지(池)요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중연(重淵)이고,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사명(賜名)은 칠석(七夕)이다.
정남이라는 훈장을 받아 정남 장군이라고도 칭한다.칠석(七夕)장군은 1390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 7월7일이어서 칠석(七夕)이란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오위 도총관, 서북면 도지휘사에 봉직 완산부원군에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8세(八世)인 최양(崔瀁)의 자(字)는 백함(伯函)이며 호는 만육(萬六)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질인 만육은 서기1351년에 탄생하여 1424년에 서거했다.
두문동 72현(杜門洞七二賢)의 한 분인 만육은 39세에 고려 문하 찬성사보문각 대제학에올랐다. 그러나 1392년 4월 포은이 선죽교에서 장절하자 전북진안 중대산(팔공산) 을 찾아 3년동안 은둔했다.
이태조가 영상의 자리에 불렀으나 불응했고 전록(田祿) 8백결도 사양하여 오직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지키기 위하여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전북진안군 백운면에 있는 유허비각인 구남각이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어린이 회관 향토 문화관에는 만육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성계가 저작하고 세종이 계술하여 규장각에 비치하고 만육후손에게 한 권을 준 유명한 금감록이란 책은 오늘도 보존되어 있다.
만육선생 유시晩六先生 遺詩
고려국(高麗國)이 망(亡)하니
불사이군(不事二君) 하시고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셔
충신(忠臣)의 길 지키셨으니
그 충절(忠節)은 일월(日月)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니
우리 그 후예(後裔) 됨을 자랑삼아
높으신 뜻 세세손손(世世孫孫) 계승(繼承)하리라.
https://youtu.be/56CNGZcktpQ?si=TrFFPoEv61eA6CH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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