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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대구 서(徐)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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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구서씨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대구서씨
성씨 서(徐)
작품명 숭조 애족 협동의 상
조각가 김복수, 김만복, 서용석
조형물번호 58

먼저 대구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은 하늘,
원 안의 ㅅ은 국문 서씨,
연결은 단합,
ㄷ은 국문 대구,
중앙부의 ㅇ 은 대종회를 상징하죠.
- 종시(宗是) : 1. 숭조사상의 앙양
2. 명예유산의 보존전승 3. 애족화합의 전통확립

- 중시조유훈 : 물태위선(勿怠爲善) :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라.
약봉 서성 선생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귀양길을 떠나면서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물이화환”으로 “태어위선” 하라고 하며 유훈으로 이른 말씀이다. '환란이 왔다고해서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라'
- 내가 비록 귀양을 가더라도 너희들은 나를 귀양
보내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아라'라는 뜻-
그럼 이제 대구서씨 문중의 유래와 인물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대구서씨(大丘徐氏)의 고향은 대구죠. 대구의 古地名이 達成이므로 후손들이 대구와 달성을 혼용하고 있다고 대구서씨대종회는 밝히고 있습니다.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는 모두 서씨의 종가인 이천서씨에서 분관되었죠. 이천서씨 문헌에는 서신일의 손자가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徐熙) 장군이고, 장군의 아들 4형제 중 서유(주)행(徐惟(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한 것으로 기록되었죠.

그러나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시조가 다르죠.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달성서씨의 향파(鄕派)와 경파(京派)였는데,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경파가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로 갈라서게 되었죠. 이렇듯 한 뿌리이지만, 계대가 실전되어 다른 본관을 쓰게 된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광산김씨, 연안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죠. 이천서씨가 해주최씨, 남양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면, 달성·대구서씨는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명문거족이었던 셈이죠.

그중 한양에 거주하던 달성서씨의 경파, 즉 대구서씨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달성서씨 중에서 주로 서울(한양)에 거주했던 경파는 영조 이후 대구서씨로 분관했습니다. 대구서씨는 시조 서한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었죠. 그래서 전객사를 지낸 7세 서익진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죠. 8세가 호조전서를 지낸 서의이고, 9세 서미성(徐彌性)이 조선에 출사하여 안주목사를 지냈죠.

달성·대구서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대문호로 알려진 서거정(徐居正)입니다. 그의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까지 6왕 45년간 6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조선의 대문호이죠.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집에는 ‘사가집’, 저서에 ‘동문선’ ‘필원잡기’ 등이 있고 대구 구암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서거정의 종현손(형의 고손)으로 달성·대구서씨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약봉 서성(徐渻)이죠. 그는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의 검열,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냈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구암서원에 제향되었죠.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입니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을 지내고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약봉의 둘째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은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이죠. 이렇듯 그의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300여 년에 걸쳐 가장 번성한 명문가문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로 유명한 서광범(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 등을 배출하였죠.

대구서씨는 상신(재상)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하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죠. 분파로는 만사공파, 전첨공파, 첨추공파, 도위공파, 봉사공파, 사가공파, 서흥파, 춘헌공파, 승사랑공파, 장원공파, 훈련봉사공파, 배산파 등 12개파가 있죠.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구서씨의 인구는 총 97,8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VP7OQZ47xxdv1c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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