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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경주 최(崔)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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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주 최(崔)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먼저 경주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경주최씨
성씨최(崔)
작품명번영(繁榮)
조각가현 광 덕(玄光德)
조형물번호30

최(崔)자를 형상화하여 만든 것으로 산(山)자 모양으로 타오르는 성화이며 번창함을 상징한다.우측의 뾰족한5점은 새추자의 윗점과 우측4획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수많은 후손들의 힘을 하나의 큰○로 모아 번영과 화합과 단결을 나타내고 있다.

문중 유래

경주최씨는 최씨의 대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으로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다. 신라를 세운 원훈(元勳)으로 법흥왕 3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 받았고 태종무열왕 3년에 문열왕 (文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유리왕 9년에 최씨(崔氏)로 사성받았다. 이것이 성을 갖게 된 유래이다.

경주최씨의 시조는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분파는 고운선생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淵源) 을 두고 있다.고운 선생은 12세의 어린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시고 그 후 여러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글을 지었는데 이 가운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귀국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무책 10여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아찬에 올랐다.

그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고운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성이요 한문학의 조종이며 절세의 명문으로 명성을 천하에 떨친 분이시다. 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과 그밖에 많은 명저를 남겼다.

고려 현종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되었다. 경주 최씨는 시조 이래로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역사상 숱한 명현 학자 관인 장상을 배출하여 도덕문장(道德文章)과 절의훈벌(節義勳閥)이 찬연한 명문거족이 되었다. 경주최씨는 명가의 후예로서 높은 긍지를 가지고 오늘날에도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조상의 빛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표정1

https://youtu.be/S8lrJzZUcGE?si=QjjL37xbhJAge0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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