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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성남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고성 남씨
성씨 남(南)
작품명 번영의 상(繁榮의 像)
조각가 남철
조형물번호 32
먼저 고성남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고성 남씨
성씨 남(南)
작품명 번영의 상(繁榮의 像)
조각가 남철
조형물번호 32
먼저 고성남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의 3개의 받침대는 남씨의 3파(고성, 의령, 영양)을 상징함으로서 고성남씨의 뿌리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상단의 대칭형태는 고성남씨의 자손들이 무한히 뻗어나가는 공간 지향적 형태로 대지를 굳게 디디고 선 무한을 향한 인간의 추상 형태입니다.
상단 중심부 반구 부조는 고성남씨의 꿈과 이상의 상징적 결정체로서 원만하고 부드러운 인간미를 상징하면서 작품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극대화하는 기능을 하도록 구상되었죠. 후면의 양각부조는 줄기찬 생명력의 번식과 미래를 지향하며 남씨(南氏) 후손들의 생명력과 번영을 기원하는 상직적 식물로서 시각적인 효과를 도입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고성남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남(南)씨는 연원이 장원하고 계보가 화창(華昌)하니 영의공(英毅公) 남민(敏)이 고덕으로 사성득명(賜姓得名)하여 가문을 열고 시조가 되었으며 그 자손들이 번성하더니 고려 중엽에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삼파로 분관하였습니다.
고성남씨는 관조(貫祖) 남광보(匡甫)의 덕화로 사대부가 연이어 나왔습니다. 8대손 남기(奇)는 고려말 공안부윤(恭安府尹)을 지냈으나 이조의 입국 (立國)에 즈음하여 높은 절의를 지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아들 도암(道庵) 남금(琴)은 태종조의 명신으로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니 남창문(昌文)과 남중문(仲文) 참봉 남의문(義文) 직제학 남수문(秀文) 진사 남익문(益文) 등 5남을 두어 모두 학행이 뛰어나 5봉(鳳)이라 칭했습니다.
특히 넷째인 경재공(敬齋公) 남수문(秀文)은 학덕과 웅문(雄文)으로 일세의 큰 스승이 되기에 동국명문선(東國名文選)에 뽑히고 세종의 신임이 두텁고 사림(士林)의 칭송이 융성하니 공의 부자에 이르러 시조 영의공 이래의 학문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후로 충효 절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아 청절 문풍의 전통을 뚜렸이 세웠습니다. 전한(典翰) 송파공 (松坡公) 남세주(世周)는 문학이 뛰어나 크게 드날릴 것을 기대했으나 연산조의 어두운 세월을 만나 간언하다가 죽으니 그 충절이 천고에 빛나고 사인(舍人) 우천당(雨泉堂) 남봉년(鳳年)과 전적(典籍) 서계공(西溪公) 남추(趎)는 정암(靜庵) 선생에게 배워 학행이 출충했으나 청절로 일관하다가 영달치 못하였죠.
그뒤는 부사(府使) 남규년(虬年)과 참봉 남인(寅), 찰방(察訪) 삼괴당(三槐堂) 남지언(知言)과 직장 남경효(景孝) 등에 걸쳐 그 충효 정절 문행이 커다란 계맥을 이루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문이 두어번 사화를 만나 사방으로 낙향하니 봉사(奉事) 남신(信)은 동생 남임(任)과 같이 대전 석교동에 이거 정착하였고, 그 현손 형조참의 남분붕(奮鵬)은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봉소루(鳳巢樓)를 지어 후생의 강학에 전념하였죠. 그 후손들은 340여년이나 이런 유산과 가문을 지켜 발전시키며 내일의 번영을 기약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성남씨는 10,801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남(南)씨는 연원이 장원하고 계보가 화창(華昌)하니 영의공(英毅公) 남민(敏)이 고덕으로 사성득명(賜姓得名)하여 가문을 열고 시조가 되었으며 그 자손들이 번성하더니 고려 중엽에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삼파로 분관하였습니다.
고성남씨는 관조(貫祖) 남광보(匡甫)의 덕화로 사대부가 연이어 나왔습니다. 8대손 남기(奇)는 고려말 공안부윤(恭安府尹)을 지냈으나 이조의 입국 (立國)에 즈음하여 높은 절의를 지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아들 도암(道庵) 남금(琴)은 태종조의 명신으로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니 남창문(昌文)과 남중문(仲文) 참봉 남의문(義文) 직제학 남수문(秀文) 진사 남익문(益文) 등 5남을 두어 모두 학행이 뛰어나 5봉(鳳)이라 칭했습니다.
특히 넷째인 경재공(敬齋公) 남수문(秀文)은 학덕과 웅문(雄文)으로 일세의 큰 스승이 되기에 동국명문선(東國名文選)에 뽑히고 세종의 신임이 두텁고 사림(士林)의 칭송이 융성하니 공의 부자에 이르러 시조 영의공 이래의 학문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후로 충효 절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아 청절 문풍의 전통을 뚜렸이 세웠습니다. 전한(典翰) 송파공 (松坡公) 남세주(世周)는 문학이 뛰어나 크게 드날릴 것을 기대했으나 연산조의 어두운 세월을 만나 간언하다가 죽으니 그 충절이 천고에 빛나고 사인(舍人) 우천당(雨泉堂) 남봉년(鳳年)과 전적(典籍) 서계공(西溪公) 남추(趎)는 정암(靜庵) 선생에게 배워 학행이 출충했으나 청절로 일관하다가 영달치 못하였죠.
그뒤는 부사(府使) 남규년(虬年)과 참봉 남인(寅), 찰방(察訪) 삼괴당(三槐堂) 남지언(知言)과 직장 남경효(景孝) 등에 걸쳐 그 충효 정절 문행이 커다란 계맥을 이루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문이 두어번 사화를 만나 사방으로 낙향하니 봉사(奉事) 남신(信)은 동생 남임(任)과 같이 대전 석교동에 이거 정착하였고, 그 현손 형조참의 남분붕(奮鵬)은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봉소루(鳳巢樓)를 지어 후생의 강학에 전념하였죠. 그 후손들은 340여년이나 이런 유산과 가문을 지켜 발전시키며 내일의 번영을 기약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성남씨는 10,801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HqikECOCegFe2_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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