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금천 강(姜)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2. 10.
728x90

오늘은 금천 강(姜)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을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금천강씨
성씨강(姜)
작품명 忠 - 氣像
조각가 고재선
조형물번호 239

먼저 금천강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중앙 상단은 투구를 조형화하여 강감찬장군의 위상과 기개를 표상화하였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직선의 웅장함으로 금천강씨 가문의 힘을 조형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그럼 이제 금천강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금천강씨 본관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른 강궁진(姜弓珍)께서 하사받은 사성(賜姓)입니다. 금천(衿川=衿州)은 시흥의 옛 지명으로 지금의 관악, 금천, 광명, 의왕, 시흥 일대가 금주(衿州) 현(縣)이죠. 관악구 낙성대(落星垈)는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께서 문곡성(文曲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곳이죠.

 

강감찬 장군은 강궁진의 2세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통해 고려를 지킨 명장으로 문하시중까지 올랐습니다. 금천문중은 고려초기에는 문벌 귀족으로 성장했으나, 고려중기부터는 쇠퇴했다가, 조선중기에 와서 14세 강희(姜曦)[吏曹正郎], 15세 강숙돌(姜叔突)[司諫院 大司憲 淸白吏], 18세 강찬(姜燦)[觀察使], 19세 강석기(姜碩期)[左議政 昭顯世子 聘父] 등이 있습니다.

 

12세손(世孫) 강양(姜揚)[漢城尹]에 이르러 비호(非虎), 비웅(非熊), 비용(非龍), 비이(非彲) 4형제를 둠으로써 문중의 파(派) [갑파, 을파, 병파, 정파]가 구성되었으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 옥사(1645)로 인해 가문은 풍비박산되어 명맥만 이어오다 숙종 43년(1717) 22세손 강봉서(姜鳳瑞)의 기개로 격쟁을 통해 신원이 복권 복직되어 갑파, 을파만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을파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일부 현종들은 경기와 충청도 일대에 분포하여 살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 인용)

<금천강씨의유래>
금천강성(衿川姜姓)의 시조는 신라 집사성 시랑(執事省 侍郞)을 지낸 강여 청(姜餘淸)이다. 강여청은 신라 때부터 금주(금천의 옛 지명)로 이사하여 살 았다. 그 후손인 강궁진(姜弓珍)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여후(呂侯)에 피봉(皮封)되었다. 이때 관향(貫鄕)을 하사(下賜)받아 금천강성이 되었다.

후손들은 관향조(貫鄕祖) 궁진(弓珍)의 고조(高祖)인 여청(餘淸)을 시조(始 祖)로 모시고 있다. 원래의 관향은 금주(衿州)였으나, 금주현(衿州縣)이 금천현(衿川縣)으로 변 경되면서 관향도 금천(衿川)으로 바뀌었다. 금천현은 이후 행정구역상 시흥 군을 거쳐 현재는 서울시 관악구로 지칭되고 있다.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은 관향조 강궁진의 아들이고 아명(兒名)은 은천(殷川), 호(號)는 울정(蔚亭)이며, 고려 귀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문관 이면서 명장으로 알려진 강감찬장군이다. 인헌공 강감찬을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으며, 체구는 작고, 검소하여 남루한 차림에 관원들이 없이 여길 때면 지혜를 발휘하여 관원들을 휘어잡았으며, 개구리 울음 소리를 멈추게 한 것을 비롯한 수많은 설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인헌공 강감찬은 옛 지명 금주로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낙 성대에서 태어났다. 매년 가을이면 낙성대에서 관악구 주체로 인헌대제를 지 내고 있다. 그 곳 봉천동에는 강감찬장군의 시호 인헌을 딴 교명(校名) 및 지 명을 쓰는 초·중·고등학교가 있다.

12세손 한성윤(漢城尹) 강양(姜揚)에 이르러 독자로 대를 이어 오다가 비 호(匪虎), 비웅(匪熊), 비용(匪龍), 비이(匪彲), 4형제를 둠으로써 비로소 갑, 을, 병, 정의 분파를 이루게 되었으나, 조선조 16대왕 인조와 왕세자 소현의 갈등으로 소현세자가 서거하자 19세손 우의정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 期)의 따님이신 소현세자빈이 강빈옥사(김자점과 조소용의 모함에 의한 소현 세자빈(민회빈)의 옥사)로 사사 당하면서 금천강문(衿川姜門)은 멸문 지화를 당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조선조 19대왕 숙종조에 이르러 22세손 강봉서(姜 鳳瑞)의 용기와 기백으로 격쟁(신문고)을 울림으로써 사면복권 복작되어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의 묘소는 민회묘에서 26대왕 고종조에 와서는 영회원으로 승격됐으나 1970년대에 정부예산문제 로 재실 및 부대시설을 철거했는데, 근래에 다시 복원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

강빈옥사 당시 가문의 멸문지화로 사사 또는 은신하면서 본관을 숨기거나 전환해 살아온 사람들이 많고,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의 왕래가 끊기 면서 남한의 문중원들만의 숫자가 통계(통계청 자료:현재 7백여 가구 2000 여명)에 잡혀 소수문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금천강씨 대종회 홈페이지 자료 인용).

https://youtu.be/zIShGYE750Q?si=IDei2-_gmbyauSKA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