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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금성 나(羅)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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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성 나(羅)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금성 나씨
성씨 나(羅)
작품명 귀선(龜船)
조각가 이동범
조형물번호 237

 

먼저 금성 나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선무공신 나대용 장군이 선조들의 슬기와 창조정신을 이어받아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제작하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을 격퇴한 공을 세웠으므로 거북선으로 조상의 얼을 삼았습니다. 비신은 배의 돛으로 유구한 씨족사를 상징하였으며, 상단의 원구는 후손들의 단합과 발전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금성나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금성나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에 오른 나총례(羅聰禮)이며, 그의 아들 나은고(恩誥)가 자의대부로 공빈승(貢賓丞)을 지내고 금산군(錦産君)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이 대광(大匡)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府院君)과 5명이 봉군되어 벌족의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한편 판호부사(判戶部事) 나득황(得璜)의 아들 나유(裕)는 고려 원종(元宗) 때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를 토평했고, 충렬왕조에서는 변경에 침입한 거란을 격퇴시켜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號)를 받아 가문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고려 말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금성나씨는 금성군(錦城君) 나익희(益禧)의 손자 나문규(文奎 : 상호군 영걸의 아들)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가 치적을 남겼으며, 상장군 수겸(守謙)의 9세손 나계종(繼從)은 고려에서 예문관 제학을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죠.

조선 중종(中宗)과 명종대(明宗代)에 문명을 떨쳤던 나세찬(世纘)은 나문규(文奎)의 7세손으로 당대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의 간악함을 탄핵하다가 여러 차례 장류(杖流)당했으나, 김안로가 사사되자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한후 이조 참의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습니다.

나세찬의 증손 나무춘(茂春)도 광해군 때 기개 높은 학자로 명성을 떨쳤고, 학정으로 있을 때 폐모론이 대두되자 검열로 있던 엄 성(嚴 惺)과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했습니다.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나득황(得璜)의 13세손 나치용(致用)이 임진왜란 때 향병을 이끌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사촌 나대용(大用)은 거북선과 해선을 제작하는 데 공을 세워 삼지창 (三枝槍 : 일명 당파창)과 청룡도 (靑龍刀)를 하사받아 평양성 방어에 공을 세운 나승윤(承潤)과 함께 충절의 가통을 지켰습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성 나씨(錦城羅氏)는 남한에 총 9,490 가구, 39,9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뿌리공원 문중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금성나씨의 인구는 51,966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KKmHw8-iViz4Q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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