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동 인(印)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교동인씨
성씨 인(印)
작품명 천년의 비상
조각가 박성순
조형물번호 241
먼저 교동인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어 자녀 교육의 덕목으로 삼은 청렴한 선비의 덕행과 명시인을 배출한 교동인씨 가문의 업적을 고서의 형태로 책과 붓을 작품으로 구상하였죠. 아래 작은 원은 과거, 중간 원은 현재, 큰 원은 미래를 의미하며 미래를 향하여 봉황이 높이 날아서 교동인씨의 인자를 감싸 안는 형상으로 표현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교동인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단(段)의 후손인 인 서(印 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297년(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아찬 벼슬과 태상박사를 제수받았으며 우리나라 교동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습니다. 2세(世) 인관(印觀)은 덕행이 높아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었죠.
신라 백제로부터 고려시대에는 이십여 분이 정승반열에 오르고 오십여 분의 당상관을 배출한 명문가로 우뚝섰습니다. 특히 고려 인종 때 33세(世) 인빈은 교동인씨 본관을 제수받은 득관조로 이태백과 소동파에 비견되는 대 시인 일 뿐만 아니라 대학자로 한림학사,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교수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습니다.
교동(喬桐)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서 해중(海中)의 섬이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교동현으로 개명하여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하여 교동현이라 하였고, 1629년(인조 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죠. 1895년(고종 32년)에 강등(降等)되어 강화군(江華郡)에 예속되었으며, 1914년 군을 폐하고 강화(江華)로 합(合)쳤습니다.
39세(世) 인공수는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맞서 고려를 위해 크게 공헌 하였고 41세(世) 인당 장군은 서북면병마사로 고구려 옛 땅 회복을 위해 압록강 건너 원나라 기지를 격파하였죠. 인당 장군의 손자인 43세(世) 인원보는 판밀직사사로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상도 함창으로 유배되면서 교동인씨 문중은 하루아침에 고려시대 명문가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위해 크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고 명맥만을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국권을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에는 60세(世) 인한수, 60세(世) 인시봉, 60세(世) 인진명 등이 항일 독립의사로서 교동인씨 가문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61세(世) 인태식이 재무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18개파 2만여 종원들이 교육계, 관계, 산업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군,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선조들께서 쌓아온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교동인씨는 20,737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I-_Mx1yRL7lvt2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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