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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인천 채(蔡)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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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천 채(蔡)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인천 채씨

성씨 채(蔡)

작품명 인천채씨

조각가 구광민

조형물번호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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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천채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채“蔡”의 상징인 거북을 표상화하여 후손들에게 번성과 번영의 미래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주 조형물인 곡선의 원형은 선대와 후대의 사랑과 화합을 상징합니다.

상단의 채“蔡”자를 떠 받치는 작품형태는 인천채씨 문중의 4파를 표상하여 대대손손 영광의 미래상을 상징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인천채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득성에 관하여는 전래되는 문헌이 부족하여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하나 중국 하남성에 건국한 채국(蔡國)이 수백 년간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기원전 477년 주변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채씨들이 여러 국가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과 춘추시대 때 기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채림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채씨(蔡氏)들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에 거주하는 채씨들 모두가 한국의 채씨는 중국 하남성에 뿌리를 둔 채씨 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시조공 채선무는 고려조의 증동지사(贈同知事)로, 어떤 파보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라 하였고 인천(仁川)에서 정착, 세거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채선무(先茂)의 손자인 채보문(寶文)은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습니다. 또한 시조의 10세손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貴河)의  시호는 정의(貞義)이고 포은(圃隱) 정선생과 어려서부터 도의를 강마하고 교양을 위한 학문을 독실하게 닦았습니다.

 

고려의 운명이 끝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공은 통곡하며 글을 써서 아들을 경계하여 가로대 나라가 무너지고 인군이 망하였으니 내가 어찌 돌아가겠는가. 맏아들 군자소감 채영(泳)은 고향에 돌아가서 삼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 둘째 아들 채부(浮) 세마는 서도 지금의 평양에 가서 부모와 스승의 남긴 가르침을 따르라. 채동양(東陽)의 아들 참의 채승(昇), 넷째 수사 채명양(明陽)은 내 뒤를 따르라 하여 목단산에 들어가 은거하였습니다. 그후 후손이 번성하여 대구를 근거하여 전국에 산재하여 살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천채씨의 인구는 43,387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wvlpv2_4u0gen2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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