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주순창 설(薛)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경주순창 설씨
성씨 설(薛)
작품명 화합
조각가 설수정
조형물번호 207
먼저 경주순창 설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두개의 기둥과 함께 어우러진 은행잎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문중의 화합과 상생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또한 측면에 놓여진 두 권의 책 중 금강삼매경론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대오하고 돌아와, 불교의 보급과 저술에 힘써, 한국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원효대사를 표현하고자 하였죠. 이두문은 이두표기법을 정리하고 집대성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식으로 새로이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였던 설총을 상징하고자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경주순창 설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경주순창 설씨 시조는 설호진(薛虎珍)이며 기원전 117년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 6촌의 하나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촌장으로서 신라를 세운 원훈(元勳)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유리왕 9년에 설씨(薛氏)로 사성받았습니다. 법흥왕 3년에 무신공(武信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무열왕 3년에 장무왕(壯武王)에 추봉(追封)되시어 이것이 성(姓)을 갖게 된 유래이죠.
시조공으로부터 18세(世)인 고승 원효대사는 신라 화엄종의 발전과 불교 대중화에 힘써 통불교(通佛敎)를 제창 화쟁사상, 일심사상, 무애사상으로 성(聖)과 속(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무애 실천자로서 98종 240여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또한 신라 3국 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고려 숙종 6년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로 성인의 시호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추증하였습니다.
성사(聖師)의 아들 설총(薛聰)은 유학의 경전을 우리말로 해석하고 읽는 방법을 표시한 이두(吏讀)를 창제하고 집대성 했으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을 도와 국정자문에 공헌한 공로자로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弘儒侯)의 시호가 내려지고 신라 10현 신라 3문장 동국 18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항되었죠.
시조로부터 36세(世) 설자승(薛子升)은 고려 인종 3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때 이자겸의 난을 피하여 전북 순창의 처향에 은둔하다가 뒤에 순창군 사호(司戶)가 되었습니다. 뒤에 증손 설신(薛愼)이 추밀원부사, 형부상서(樞密院副使, 刑部尙書)로 순화백(淳化伯)에 봉작되고 현손(玄孫) 설공검(薛公儉)은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고려 최고의 관직과 태묘(太廟)인 고려 종묘에 배향되고 문량공(文良公)으로 시호가 내려짐으로써 추존하여 설자승(薛子升) 선조는 순화백에 추봉되었습니다.
36세 설자승 선조 이후 고려 후기 200여년 동안 경상(卿相)이 9명이 배출되어 고려 후기 세도가 20가문 중의 한 가문으로 크게 발전했죠. 경주순창 설씨는 경주에서 발원하고 순창에서 중흥하여 명현석덕(名賢碩德)과 절의훈벌(節義勳閥)이 배출한 명가 후예로서 우리 후손들은 높은 긍지를 가지고 각계 각층에서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조상의 빛난 전통을 계승발전하고 후세에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문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설씨 인구는 3,407명, 순창설씨 35,825명으로 경주순창설씨 인구 합계는 39,232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nQ-etjxvG0f6I8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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