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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평창 이(李)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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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창 이(李)씨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평창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기원(祈願)
조각가 이경아
조형물번호 174

먼저 평창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솟아 오르는 물기둥을 형상화하여 평창이씨 문중의 상승기운을 표상화하였습니다.

세 개의 주 조형물은 문중의 과거 현재 미래의 화합과 번영을 뜻하며, 물이 생명의 근원이 되듯 유래비의 물길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명수를 공급함으로써 문중의 자손들이 영원한 번영을 누린다는 미래 지향적 의미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평창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평창이씨 시조는 고려 명종 때 태사(太師)를 지낸 백오군(白烏君) 이광(匡)입니다. 시조를 위시하여 7세 이태(台)까지의 묘소가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웅탄면(熊灘面) 금평리(金坪里)에 소재하고 있어 이곳을 평창이씨 본 고장으로 삼아 오고 있습니다.

8세조 이천기(天驥)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고 사신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니 이 태조(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였습니다. 이 태조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니 이 태조는 그 절개를 귀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하고 후손들은 『이광을 시조로 이천기를 중시조로 하여 평창을 본관으로 삼아』 19개 파로 분파하여 전국 각지에 산거하고 있습니다(평창이씨 대종회 건립 뿌리공원 문중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평창이씨의 인구는 80,607명이었습니다.

*문중의 유래비는 "평창이씨 대종회" 에서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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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이씨 중앙종친회 홈페이지
"서기 2012년 3월16일 평창에서 휘 윤장(潤張)조(祖)를 시조로 모시는 각 종파 종친회 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종친회는 『평창이씨 중앙종친회』로 하고 18개 파를 임원으로 하는 평창이씨 종친회를 재정립하고 임원을 새로 선출하였습니다." 중앙종친회 회장 인사말 인용(홈페이지)

평창이씨의 발원 (平昌李氏의 發源)

시조 휘 윤장(潤張) 또 천우(天佑)라고 이름호 백아(白雅) 시호(諡號) 문성공(文成公)표공의 37세손 거명씨가 신라조때에 벼슬은 중서령을 지내고, 아들 금현씨는 벼슬은 병부령을 지내고, 금현씨의 아들금서씨는 벼슬이 중원태수 호부랑중을 지내셨는데 신라 56대의 왕인 경순왕 김부의 셋째 딸 신난공주를 마저서 부마가되어 두분의 아들을 낳으시니, 장자는 윤홍씨요 차자는 윤장(潤張)씨라 이르니 윤홍씨는 경주이씨 선조가 되고 윤장씨는 평창이씨의 시조가 되시니 한뿌리에 나서 성은 같으나 관향은 다른고로 경주이씨의 구보와 평창이씨의 구보를 상고하고 또 역사를 상고하여 자세히기재하는 바이라. 우리 시조 백오부원군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의 초기에 나라에 공훈을 남겨 백오부원군을 봉함으로써 비로서 관향을 경주로부터 평창으로 분적하셔서 우리평창이씨의 시조가 되시니라. 그 후 문성공의 시호를 받으시니라.

휘 윤장(潤張)은 평창이씨(平昌李氏)의 시조(始祖)이며 8세손 휘 광(匡)은 중조(中祖)입니다.

우리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시조인 표암공 휘 알평(謁平)의40세손(휘 거명의 4세손)으로 휘 윤홍(潤弘)의 아우인 휘 윤장(潤張)이 평창이씨로 분적(分籍)되어 시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서기 1500년대에 처음 만들어 졌으며, 평창이씨도 서기 1524년 갑신보를 시작으로 서기 1640년경진보 서기 1684년갑자보가 발간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보되어 찾아 볼 수가 없다. 경진보를 발행하신 저자 휘수원(壽鵷)은 족보의 서문에 경주이씨 휘 거명(居明)의 4세손 금서(남계)의 세 아들이 각 각 관향을 가졌다고 기록하였다. 장자 휘 윤홍은 경주 차자 휘 윤장은 평창 윤원은 가평을 뜻합니다. “남계선생유삼자개이문장대관각사잉관언칙오대인(南係先生有三子皆以文章大官各賜仍貫焉則吾大人)”이라고 썼음. 휘 수원은 23세손으로 평천군파입니다. (p. 96~99참조)∘ 서기 1740년 경신보(영조16년) 서기 1770년 경인보(영조46년)는 익평공파 28세손 휘 광부(光傅)가 발간하였고 평창이씨구보서(平昌李氏舊譜序)라는 서문에 “유아이씨재어해동삼대성도급여지지갑이저현어라려지제기래원의(維我李氏載於海東三大姓圖及輿地誌盖已著顯於羅麗之際其來遠矣)”라고 기록하였는데, 풀이하면 우리이씨는 해동삼대성도와 여지지에- 26 -등재 되어있고 이미 신라와 고려로 나타나서 내려온 것이다라는 뜻으로 정리하면 해동삼대성도와 여지지는 신라와 고려즈음의 문헌으로 이미 신라 경주이씨에서 고려 평창이씨로유래가 되어서 나타나 내려온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p. 78~80참조)∘ 휘 광(匡)은 서기 1125년(인종3년)에 출생하여 명종조에서 태사(太師)에 오르고 명종13년에 졸하고 백오군(白烏君)에 봉(封)하여 졌습니다. 휘 광의 선계가 있음을 이미 알고있었으나 선대의 이름과 배위 신분사항 등을 알 수 없어 세계순서를 휘 광(匡)을 1세로 적어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서기 1740년(경신보)와 서기 1770년(경인보)를 발행한휘 광부는 서문평창이씨구보서에 언급 추측에 따라 “시조1세 광”이라고 표기하지 못하고 시조 두 글자를 뺀 “1세광”으로 적어서 세계를 이어 놓았습니다. 서기 1700년대 이후의 족보를 보면 서기 1802년(임술보) 서기 1843년(계묘보) 서기 1867년(정묘보)등은 1세 광으로 시작하여 등재되었고 서문인 평창이씨구보서는 족보 마다 다 등재 하여 놓았습니다.∘ 서기 1881년(신사보)를 발행한 평장공파 휘 존수(存洙)의서문“존의록(存疑錄)”의 기록이 선계록, 본원선계록과 똑같은 내용으로 등재 되어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27 -※ 이 존의록(存疑錄)의 내용은 평강(平康)의 종인(宗人) 가첩(家牒)에서 나왔다 라고 출처까지 밝혀 적어놓았습니다. 휘존수(存洙)는 31세손이며 평장공파입니다.(p. 81~86 참조)내용중에 의심나고 결정 지을 수 없는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휘 윤장께서 태봉과 견훤을 친 것이 심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연대가 막연하여 와전된 것이 있으니 빼는 것이 옳을것이다. 라고 수록되어있는데, 서기 1900년 경자보를 발간발행하면서 선조들이 이런 내용을 참고하여 논의를 거쳐 조치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여봅니다. “시조께서 직접 태봉과 견훤을 평정하신 것이 아니고 이 들이 몰락 사망후 그 잔류 무리 추종자들이 세력을 굽히지 않고 연고지역이나 기타 지역에서 반란을 하니 이를 평정하는데 참여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상님들이 남기신 업적을 오늘에 와서 후손들이 왈가왈부하여서도 안되며 옳고 그름에 대하여도 신중한 논의를 거쳤으면 하는 바램도 들지만, 업적 그 자체를 계승전승 받는 것이 선조에 대한 후손의 도리입니다. 경주이씨 중앙화수회를 평창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방문하였을 때 그분들의 생각도 우리와 일치하는 말씀으로 옛날 선조들이 이룩해 놓으신 업적을 후손들이 함부로 부정하는 언행은 안되며 조상들께서 어디서인가 근거에 의하여 기록하여실행 하였을 것을 오늘에 와서 거론하여 부정하면 존조숭모- 28 -의 효행을 저버린 불효한 범죄 행위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평창이씨도 조상들께서 남기신 업적을 계승 받아야 옳습니다.∘ 서기 1900년 경자보 서기 1919년 기미보 서기 1920년경신보 서기 1925년 을축보 등은 시조 휘 윤장을 필두로 세계를 적었고, 서기 1937년 정축보부터는 시조 휘 윤장을 1세로 수록 등재하여 2세 중(仲), 3세 일(鎰), 4세 완(宛), 5세 충덕(忠德), 6세 운봉(雲峰), 7세 선초(善招), 8세 광(匡)순으로 세계를 이어 족보를 만들었습니다.(p. 189~192참조)정축보 이후 서기 1958년 무술보(일제 강점기와 6.25사변등 혼란기 후 처음 만든 족보)와 서기 1978년 무오보를 거쳐 서기 2017년 현재까지 모든 족보에 시조 휘 윤장을 1세로 표기하고 등재하여 족보를 발간 발행하고 있습니다.
(평창이씨 중앙종친회 홈페이지 에서 발췌)
 

https://youtu.be/zIShGYE750Q?si=eN_NPh5RvnEXLG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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