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수황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장수황씨
성씨황(黃)
작품명청백리(淸白吏)
조각가황혜진
조형물번호173
먼저 장수황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자자손손 장수황씨는 세상에서 귀감이 되는 성씨로 번성해 나가는 대종회가 되기를 염원하는 의미로 표현하였죠. 작품의 주재료는 마천석, 상주석, 황등석, 오석으로 석재의 색채를 활용한 조형물입니다. 청백리 작품은 장수황씨의 선조인 황희 정승의 초상조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고자 계획했죠. 하단의 원형 기단은 장수황씨의 유래와 작품제작을 위해 공헌하신 후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공간으로 제작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장수황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는 신라 말 경순왕의 부마이며 시중이었던 황경(黃瓊)이죠. 그 후손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 벼슬을 지내다가 선대의 고향인 장수(長水)로 귀향했다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현 광한루터에 세거했습니다.
그후 태학생으로 학문에 뛰어나 일재 황감평(黃鑑平)의 증손인 황석부(黃石富)가 장수황씨 중시조이죠. 그의 증손이 청사에 길이 남을 방촌 황희(黃喜)
정승입니다. 황희 정승은 90평생에 70여 년을 관직에 몸담으면서 조선조 개국 이래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4대 임금을 모시고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했죠.
또한 황희는 정승으로 24년 중 영의정으로 18년간 재임하면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고 세종대에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승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고, 청백리로 추앙받고 있죠.
황희 정승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치신(致身) 둘째 보신(保身) 셋째 수신(守身)이며, 셋째 아들은 아버지에 이어 영의정에 올라 가문의 영예를 이어갔죠. 조선조 중엽에는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으로 장산군에 책봉된 정의 황탄(黃坦), 정국공신 장원군에 봉해진 소양 황맹헌(黃孟獻), 임진왜란 직전 일본 통신사 정사로 적정을 정확하게 보고한 송당 황윤길(黃允吉)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무민공 황진(黃進) 장군, 광국공신 장계부원군 대제학 문정공 황정욱(黃廷彧) 등이 일족의 명예에 빛을 더 했죠. 한말 매천야록을 집필 중 한일합병의 국치를 통분하다가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이며 유학자인 매천 황현(黃玹) 등이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수황씨의 인구는 170,988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C6UXRyJCRZ4?si=oKmlWzvnHCYbY3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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