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함안 이(李)씨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안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선열의 기상
조각가 이복규
조형물번호 168
먼저 함안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함안이문의 조형물은 고려조와 조선시대에 걸쳐 조국에 헌신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기상을 조형화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함안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안이씨(咸安李氏)는 고려 고종조(서기1213-1259)에 광록대부에 오르고 공을 세워 파산군(巴山君)에 수봉(受封)된 이상(李尙)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습니다.
파산은 경상남도 함안군의 옛 군명으로 후손들은 시조의 봉군지(封君志)인 함안을 관향으로 삼고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죠. 파산군의 두 아들인 2세 문하시랑평장사 이청(李淸)과 판도사판서 충의공 이원(李源)형제, 3세 문하시중 이홍(李弘)과 상장군 원수 중서평장정사 충렬공 이방실(李芳實)종 종형제들이 함안이씨의 현달의 문을 열었습니다.
특히 충렬공은 1361년(공민왕 10년) 20여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자, 다음해 도지휘사로서 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는 등 여러 차례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한 구국의 명장이죠. 충렬공은 고려조 왕들의 사당인 경기도 연천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된, 고려 500년 사직을 지킨 16공신 중의 한 분입니다.
조선 세조 때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8세 이미(李美)는 고향인 진주군 동면 가좌촌리 진동 월아산 아래에 용두정(龍頭亭)을 짓고 “육영일문 현재배출”의 기치 하에 배움에 불타는 학동들과 네 아들(인형仁亨, 의형義亨, 예형禮亨, 지형智亨)의 정훈(庭訓)에 힘써 “오부자 육급제”를 이루니 성종께서 진동에 가좌촌(佳佐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했죠.
또한 사재감부정을 지내시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8세 이계통(李季通)은 순충보조공신 함성군(咸城君)에 추봉되었고, 그의 아들 9세 이세응(李世應)은 중종조에 분의정국공신이 되고, 이조참판과 4도의 관찰사등 많은 벼슬을 거친 후 함안군(咸安郡)에 수봉되어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문중에서 3대가 ‘君’에 봉(封)해진 것은 아주 드문 일로써 함안이씨를 명파의 부당함을 상소하다 죽임을 당하여 기묘사화의 명현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2세 이응성(李應星, 의형의 증손 號 新川齊, 고원군수)은 창의하여 대공을 세우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습니다.
13세 이달(李達, 의형의 현손, 號 雲圃, 동지중추부사) 역시 창의하여 진주성 방어에 참가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죠. 이러한 조상들의 높은 충직성을 본 받고 자부심을 갖기 바라는 마음에서 다 같이 뜻을 모아 이 조형물을 건립합니다(문중의 유래비문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안이씨의 인구는 41,064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zIc48SdMy4_7JG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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