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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양성 이(李)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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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성 이(李)씨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양성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양성인이여 깨어나라
조각가 배정문
조형물번호 166

먼저 양성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시조 이수광을 바탕으로 9개의 파로 이루어진 양성이씨 문중을 표현하고 9개파의 높은 기상을 아홉개의 덩어리로 표현함으로써 양성이씨의 기상과 후대에 문중의 발전을 표현하여 선대의 업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정면의 가운데 부분은 오얏 꽃의 개화형상을 단순화하여 문중의 번영과 화합을 다짐하며, 중앙에 양성이씨 마크 형상을 표현하였죠. 하단의 나뉘어진 부분은 양성이씨의 억겁의 뿌리를 나타내어 문중이 표현하고자 하는 유래를 바탕에 둔 작품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양성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조(1046~1083)때 삼중대광 보국(輔國)의 벼슬과

양성군(陽城君)의 군호를 받아 득성했습니다.

시조 이수광은 고려 문종조 때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 겸전한 인품으로 상호이해와 설득 그리고 무마로 동침야욕을 봉쇄하고 선린우호관계를 맺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라를 안연(安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출장입상과 덕망이 높아 당시 세인들이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죠.

송나라가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 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자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특진금오위대장군(特進金吾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의 작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습니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이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시조의 유지(遺祉)가 양성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표지(標識)가 없어 실전되었습니다.

양성은 고구려 때 사복흘(沙伏忽), 신라 때 적성(赤城), 고려 초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 안성시 양성면과 평택시 죽백동 일원의 옛 지명입니다.

현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 유좌지원에 1848년 헌종 14년 시월, 시조 이수광의 단과 5세위까지 설단 하였습니다. 1984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산 20 무갑산 능골에서 4세 부마공(駙馬公) 이영주(李英柱), 배위 순정공주(順正公主), 계배위 정씨의 묘소를 시조단하에 천묘하였습니다.

2013년 11월 3일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중용리에 묘소가 위치한 6세 석탄공(石灘公) 이수방(李守邦)의 단비(壇碑)를 추가 설단하여 명실상부하게 시조묘역을 성역화하고, 매년 음 10월 1일 세향을 받들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성이씨의 인구는 55,246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N9ZIKeVsisiwKY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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