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창 맹(孟)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신창 맹씨
성씨 맹(孟)
작품명 門 - 청렴의 상
조각가 조영곤
조형물번호 137
#신창맹씨
먼저 신창맹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조선조 명재상인 맹사성의 청백한 이미지를 선비의 갓과 대나무로 표상하여 가문의 역사성을 상징하였습니다.
전체적인 작품구성을 통해 선조와 후손이 화합하고, 나라와 가문의 번영과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문(門)의 형태로 형상화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신창맹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아성공 맹자(孟子)의 후예로 한국지파의 원조(遠祖)는 맹자 40세손 맹승훈(承訓)으로 당이 멸망할 때 정란을 피하여 왕래가 빈번하였던 기량천(신창현)을 거처 도래한 것으로 알려져 이후 신창이 맹씨의 본관이 된 유래입니다.
맹씨는 선계(先系) 맹리(理) 시중공을 비조로, 고려 충혜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신창백에 훈봉된 맹의(儀) 이부전서공이 시조입니다.
2세는 맹유(裕) 맹복(福) 두 분으로 맹유는 이부상서를 역임한 상서공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다 두문동에서 순절한 72현의 한 분 이며, 맹복은 공조전서를 지낸 전서공으로 관북파의 파조입니다.
3세는 두문동 72현의 또 한 분이며 수문전 제학을 역임한 맹희도(希道) 동포 공으로 아버지 상서공이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구세거지인 한주(서천)를 거처 사돈 최영(崔瑩) 시중공의 옛집이 있는 온양 금곡촌(아산)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모아 강론하니 이곳을 행단(杏壇)이라 이르고 현재 국가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조가 온양 행차 시 공의 묘소에 치제를 지내고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의 어필사액을 내리니 맹씨 문중의 영광이요 명예입니다. 4세는 맹사성(思誠) 문정공이다. 그는 고려조 최영(崔瑩) 시중공의 손서로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우헌납을 역임 중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수원 판관으로 출사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등 4조를 섬기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현신입니다. 특히 공은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일 뿐 아니라 백성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5세는 맹귀미 (歸美) 감찰공이고, 6세는 맹효증(孝曾) 중추부사와 맹계증(繼曾) 형제로 맹효증은 자손이 무후하고 맹계증은 공조참판에 증직된 신원군(新原君)이죠.
7세는 맹석흠(碩欽), 맹석경(碩卿), 맹석준(碩俊), 맹석린(碩麟) 네 분이나, 석린은 자손이 무후하니, 이후 신창군파 맹석흠(碩欽), 사직공파 맹석경(碩卿), 호군공파 맹석준(碩俊) 등 3파로 분파되어 2세 분파인 관북파를 포함 4파로 나뉘어 대대로 많은 등과(登科), 현관, 공신, 효자, 효부 등을 배출한 우리나라 유수의 명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맹씨문중은 충효세업 청백가성을 종훈으로 충효, 청백, 충신, 접례, 수절 등 선조의 유훈을 널리 계승 발전 시키고자 여기에 유래비를 세웁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창맹씨의 인구는 19,971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W41JI8MrQjTiQbl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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