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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청주 양(楊)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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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주양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청주 양씨
성씨 양(楊)
작품명 청렴
조각가 김태훈
조형물번호 139


먼저 청주양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청주양씨의 시조 양기(楊起)는 원나라 금자광록대부 중서성정승으로 있을 때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고려태자령정이 즉위차 환국할 때 노빈도령으로 공주를 배종하여 동래하였으며 그후 만 백성의 적폐였던 세공(동녀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저포 6만필 등)을 삭감하여 그 빛나는 공훈으로 나라에서 삼중대광보국 숭록대부 및 상당백을 봉하고 본관을 청주로 사관하여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청주양씨의 시조 양 기의 세공삭감의 공훈처럼 청렴하고 결백하며 바른 삶을 살아온 대쪽같은 기상을 표현하고자 대나무의 마디를 인용하였죠. 작품의 하단에 구름을 깔아 수직으로 곧게 뻗어 구름 위 하늘까지 닿는 청주양씨의 바른 청렴한 기상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청주양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시조 양기(楊起)는 본래 중국의 홍농양씨(弘農楊氏)로 후한 때 사지공(四知公)이라 칭했던 양진(楊震)의 43세손입니다. 양기의 字는 가윤(可尹)이고 號는 암곡(巖谷)이며 원나라에서 태어나 등과(登科) 하였습니다. 원(元)나라 조정에서 금자광록대부 도첨의정승으로 재임 중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공민왕과 혼인하면서 1351년 12월 공주를 배행하여 고려로 왔습니다.

고려에 들어와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는 동녀(童女)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모시 6만필의 사대세공(四大歲貢)을 삭감 받아 그 공훈으로 벽상삼한창국공신 청백리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지고 청주, 해주, 송화를 식읍으로 받았습니다. 이때 관향을 청주(淸州)로 하사받아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만년에 벼슬을 마치고 송화 묵산(墨山)에서 지내다가 홍무(洪武)갑술(甲戌)칠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금이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내리고 양기(楊起)의 유상(遺像)을 비단에 그려 하사하는 한편, 수증사(修證寺) 동편에 충헌공 영당(忠憲公 影堂)을 짓게 하고 지역의 선비들에게 제사를 모시라 하였죠.

이후 좌부승지 이상신(李尙信)이 왕의 윤허를 받아 양기(楊起)의 후손들에게 군역과 잡역을 영원히 면제하는 수교문(受敎文)을 내렸습니다. 후손과 지역의 선비들이 노성(魯城), 보성(寶城), 창녕(昌寧)에 충헌사(忠憲祠)를 창건하여 청백리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논산 충헌사는 200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되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주양씨의 인구는 38,161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w6WQZASGFA-4W6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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