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안악 이(李)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0. 16.
728x90

오늘은 안악 이(李)씨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안악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굳은 절개(節槪)

조각가 류 훈

조형물번호 134

 

먼저 안악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굳은 절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안악 이(李)씨의 지조(志操) 있는 역사를 모태로 하여 예술적으로 재구성 하였습니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꿋꿋한 의지와 기개가 후세에 긍지와 자부심으로 영원하라는 염원을 담아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안악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안악이씨 시조 이견(李堅)은 고려 공민왕 9년에 홍건적이 침입해옴에 검교문하대승 상장군(檢校門下大丞 上將軍)으로 출전하여 함종(咸從)에서 순절하자 이를 대군이 정의를 위해 분발하여 대승을 거두니 안악군에 봉해졌습니다.

 

2세 이정림(李挺林)은 봉선대부를 지냈으며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면서 가세를 일으켰죠. 3세 이의만(李義萬)은 광정대부 문하찬성사(匡靖大夫 門下贊成事)로 보임되었으며 고려 말 혼란기에 허물을 입고 경상도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후손들이 영남지방에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습니다.

 

4세 이흥부(李興富)는 밀양에서 이흥인(李興仁)은 진주에서 침입해온 왜구를 섬멸해 지병마사(知兵馬使)와 만호(萬戶)로 임명 되었습니다. 이흥부의 아들 이설(李渫)은 예조참의, 이흥인의 아들 이호(李灝)는 예조판서를 지냈습니다.

 

이계을(李桂乙)은 정순대부(正順大夫)를 지냈으며 이계을의 손자 이구관(李九寬)은 봉정대부 안악군수(奉正大夫 安岳郡守)를 지낸 뒤, 괴산군에 터를 잡아 살게 되자 이 지역이 안악 이씨의 새로운 세거지가 되었죠. 임진왜란을 당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이운기(李雲起), 이운장(李雲長) 형제는 의병을 일으켰죠.

 

이운장은 곽재우(郭再祐) 막하에서 수병장이 되어 경남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차단, 호남 진출을 저지하고 순절하니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어 충익사(忠翼祠)에 모셔져 있죠.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 이용운은 해군작전국장과 해군참모총장을, 이용문은 육군작전국장과 수도사단장을 역임하고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에 보임되었다가 전남 운봉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용문은 군인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분으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옛 상관을 기리는 승마대회를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하게 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죠.

 

시조를 모신 일원제(一源齊)가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지동에 있으며, 그 경내에 시조 공의 신단비(神壇碑)와 선조 5代 7位 단비를 모신 봉단이 있어, 해마다 전국의 종원들이 모여 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안악이씨는 12,319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sCG3sVMEjDO7c5rG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