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현풍 곽(郭)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0. 14.
728x90

오늘은 현풍 곽(郭)씨 문중의 유래를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함께하시죠.

 

현풍 곽씨
성씨 곽(郭)
작품명 광영탑(光榮塔)
조각가 김경석
조형물번호 132

먼저 현풍곽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장중한 석탑의 몸체와 왼쪽의 조형물은 현풍곽씨(玄風郭氏) 문중의 명현과 충신 등 자랑스러운 선조들께 바치는 후손들의 공경심을 상징합니다. 그 위에 크고 밝은 태양은 가문의 영원한 광영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현풍곽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현풍곽씨의 시조 곽경(郭鏡)은 17세의 젊은 나이에 팔학사(八學士:곽경〈郭鏡〉, 신경〈莘鏡〉, 하경〈河鏡〉, 지경〈池鏡〉, 노경〈盧鏡〉, 원경〈元鏡〉, 경경〈慶鏡〉, 장경〈張鏡〉)의 수장(首長)으로서 이분들이 이끌고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함께 살기좋은 동방의 고려국에 래사(來仕)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조 곽경은 인종 16년(1128年) 과거에 급제한 후 누진(累進)하사 최고위직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등을 역임했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포산(苞山)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지명이 포산(苞山) 현(縣)에서 현풍(玄風) 현(縣)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이 현풍(玄風)으로 변경되었죠. 고려조에서는 명현인 팔학사(八學士)를 기리기 위하여 평양 대동강 석벽상(石壁上)에 팔경대(八鏡臺)라는 석비를 세우고 그 뒷면에 팔학사들의 시를 모두 새겨 넣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곽문은 고려조에서 네 분의 포산군(苞山君)과 한 분의 포산백(苞山伯)을 받았고 사군일백(四君一伯)을 배출함으로서 훌륭한 청백리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되었죠.

조선조에서는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재를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지휘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난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우신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은 우리역사에 길이 남을 불 세출의 영웅이며 애국충신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 곽문(郭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현풍곽문은 고려조 때부터 도덕가문으로 일컬어 왔으며 조선조 때 일문삼강(一門三綱)과 십이정여문(十二旌閭門) 현곽팔주(玄郭八走)로 영남일대에 널리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후손들은 고려조부터 전해온 충효세업 청백가성의 문훈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현풍곽씨는 166,608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SjOyYmYimqWEFWf3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