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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산김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광산김씨
성씨김(金)
작품명
조각가박병희
조형물번호95
먼저 광산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광산김씨의 화목하고 풍요로운 모습의 가족상과
훌륭한 가문을 두 손으로 받드는 형상으로
천대만대 조상을 섬기며 자손이 번창하는
아름다운 광산김씨 기상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 광산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인 흥광(興光)을 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왕자께서는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무주 서일동 지금의 담양 평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기에 광산(光山)으로 관향을 삼게 되었습니다.
아들 김식(軾)이후 대대로 고려의 높은 벼슬인 평장사로 오른 이가 여덟 분이나 되어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 김태현(文正公 台鉉),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周鼎), 양간공 김연(良簡公 璉), 사온직장공 김영(司?直長公 英)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가문이 번창하고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삼한갑족으로 일컬어졌습니다. 18세(世) 김정(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중대광대호군(重大匡大護軍) 광성군에 올랐는데 세 아들인 관찰사공 김약채(觀察使公 若采), 척약재공 김약항(?若齋公 若恒), 직제학공 김약시(直提學公 若時)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현달했습니다.
김약채(若采)는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 잡게 되어 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죠. 김약채(若采)의 증손 김국광(國光)은 적개공신(敵愾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두 개의 공훈에 책록되고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경국대전을 지었죠. 김국광(國光)의 5대손 사계 김장생(沙溪 長生)선생은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켰죠.
사계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성학(聖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한 거유(巨儒)로 그 학통이 아들 신독재 김집(愼獨齋 集)에게 전해졌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門下)에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우리 역사를 빛낸 큰 학자가 줄을 이어 나와서 드디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대한 맥을 형성했죠. 연산의 돈암서원에 기호학맥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광산김씨 가문이 영예로운 것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열여덟 분이 오른 국학 성균관의 문묘에 두 분이 배향되었고 특히 부자(父子)인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만이 누릴 수 있는 대제학을 일곱 분이나 배출한 사실이죠.
또 사계선생의 셋째 아들인 허주 김반(虛舟 槃)의 손자인 서포 김만중(西捕 金萬重)선생은 충효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지어 우리문학사를 크게 빛냈죠. 그 밖에 정승판서, 장군, 충신열사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습니다. 그 대략은 조형물의 뒷면에 기록합니다.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광산김씨
성씨김(金)
작품명
조각가박병희
조형물번호95
먼저 광산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광산김씨의 화목하고 풍요로운 모습의 가족상과
훌륭한 가문을 두 손으로 받드는 형상으로
천대만대 조상을 섬기며 자손이 번창하는
아름다운 광산김씨 기상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 광산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인 흥광(興光)을 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왕자께서는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무주 서일동 지금의 담양 평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기에 광산(光山)으로 관향을 삼게 되었습니다.
아들 김식(軾)이후 대대로 고려의 높은 벼슬인 평장사로 오른 이가 여덟 분이나 되어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 김태현(文正公 台鉉),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周鼎), 양간공 김연(良簡公 璉), 사온직장공 김영(司?直長公 英)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가문이 번창하고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삼한갑족으로 일컬어졌습니다. 18세(世) 김정(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중대광대호군(重大匡大護軍) 광성군에 올랐는데 세 아들인 관찰사공 김약채(觀察使公 若采), 척약재공 김약항(?若齋公 若恒), 직제학공 김약시(直提學公 若時)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현달했습니다.
김약채(若采)는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 잡게 되어 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죠. 김약채(若采)의 증손 김국광(國光)은 적개공신(敵愾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두 개의 공훈에 책록되고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경국대전을 지었죠. 김국광(國光)의 5대손 사계 김장생(沙溪 長生)선생은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켰죠.
사계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성학(聖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한 거유(巨儒)로 그 학통이 아들 신독재 김집(愼獨齋 集)에게 전해졌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門下)에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우리 역사를 빛낸 큰 학자가 줄을 이어 나와서 드디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대한 맥을 형성했죠. 연산의 돈암서원에 기호학맥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광산김씨 가문이 영예로운 것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열여덟 분이 오른 국학 성균관의 문묘에 두 분이 배향되었고 특히 부자(父子)인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만이 누릴 수 있는 대제학을 일곱 분이나 배출한 사실이죠.
또 사계선생의 셋째 아들인 허주 김반(虛舟 槃)의 손자인 서포 김만중(西捕 金萬重)선생은 충효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지어 우리문학사를 크게 빛냈죠. 그 밖에 정승판서, 장군, 충신열사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습니다. 그 대략은 조형물의 뒷면에 기록합니다.
https://youtu.be/RwI0yYu4Sg0?si=SO6tf4OXps3FCn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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