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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부이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고부 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생(生)의 찬미(讚美)
조각가 유 선 리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조형물번호 6
#고부이씨
먼저 고부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고부 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생(生)의 찬미(讚美)
조각가 유 선 리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조형물번호 6
#고부이씨
먼저 고부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 '생의 찬미'는 고부이씨(古阜李氏) 선조의 얼과 기상으로 후세에 이르는 자손만대의 화목된 번영과 영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사방에서 볼 수 있는 피라미드 형상의 도형으로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가운데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고부이씨의 미래지향적인 다짐의 조형물이죠. 또한 좌우의 승천하는 크고 작은 두기둥은 한자의 사람인(人)에서 뜻하는 남(男)과 여(女), 즉 음양의 조화로 고부이씨들이 하나가 되어 미래를 밝히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성씨 유래를 새긴 중앙 오석(烏石)위의 나무에 새겨진 고부이씨 상징마크와 가족상은 튼튼한 반석위에 뿌리를 뻗는 풍성하고 굳건한 나무의 이미지처럼 부모와 자녀가 어울려 즐겁게 손잡고 있는 모습을 조형화 하였죠. 이로써 고부이씨들의 단합과 효(孝)와 충(忠)에 뿌리를 둔 삶을 통해 풍요로운 미래의 번창을 기약하고자 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씨 유래를 새긴 중앙 오석(烏石)위의 나무에 새겨진 고부이씨 상징마크와 가족상은 튼튼한 반석위에 뿌리를 뻗는 풍성하고 굳건한 나무의 이미지처럼 부모와 자녀가 어울려 즐겁게 손잡고 있는 모습을 조형화 하였죠. 이로써 고부이씨들의 단합과 효(孝)와 충(忠)에 뿌리를 둔 삶을 통해 풍요로운 미래의 번창을 기약하고자 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고부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고부이씨 시조 이경조(李敬祖)는 고려 정종 서기 1035년에 고부(古阜)에서 탄생했습니다. 문종 1047∼83때 한림학사 서장관이 되어 봉명사신으로 송나라에 왕래하고, 숙종 1096∼1105때 국자감판사 문하시랑 평장사 검교첨의 정승 추충보정공신으로 여산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입니다.
고부이씨 시조 이경조(李敬祖)는 고려 정종 서기 1035년에 고부(古阜)에서 탄생했습니다. 문종 1047∼83때 한림학사 서장관이 되어 봉명사신으로 송나라에 왕래하고, 숙종 1096∼1105때 국자감판사 문하시랑 평장사 검교첨의 정승 추충보정공신으로 여산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입니다.
조선 정조 임인 1782년 창보에 고려검교 성균대사성 첨의찬성사 정승이라하고 가첩에는 단대사성으로 기록되어 제가계단을 고증하니 관직이 이상과 같아 방주에 열서하여 후일 고거를 기대합니다.
고부가 세거지로 고부 두승산 남록에 이정승 묘 등이 있습니다. 공의 이상 세계는 없으니 고려시대의 사성입니다. 단, 공의 형 이경선(李敬先)이 있어 첨의정승 일원랑이니 파계무거하여 별보에 기재하였습니다. 문헌은 고려사 세가별전, 동국유현록, 한국성씨대관, 한국인의 족보에 있습니다.
순종 후 무진1928년 5차 수보 시에 전북 부안군 줄포면 목상리 561번지 산에 사단비를 설립하고 승지 안동 김녕한(金寗漢)이 비음기를 찬술 고부읍지 부안읍지 제단편에 상세히 기록하고 1969년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 산6에 16세손 고려9충신 중랑장 초(初)공의 단묘영역 서편 국도변에 세적비를 건립, 그후 1989년 문학박사 류재영(柳在泳)이 비문을 찬술 신도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원래의 정읍현은 조그만 소읍이었으나 고부는 삼국 이래 서해안의 요진으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부는 마한 시대 고비이국으로 추정되는 지역이요, 백제시대에는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고사성이 있던 곳으로 고사부리군의 관청이 정치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하여 757년 신라 경덕왕16년에 비로소 고부로 일컬었습니다. 서기 936년 고려 태조19년에는 고을 이름을 영주(瀛州)로 개칭하고 관찰사를 두었으니 이때 정읍, 태인, 인의, 고창, 흥덕, 부안 등 고을이 영주에 속하였으며 그 터가 현 고부면 입석리입니다. 951년 고려 광종2년에는 안남이라 일컬었고 도호부를 두였으며 1019년 고려 현종 10년에 다시 고부로 개칭하고 고을터를 고부리 성황산으로 옮겼습니다.
1894년 고종 31년 갑오동 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1914년 4월1일 군 통폐합에 의해 정읍군에 속하고 현재 고부면이 되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부이씨는 22,891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고부가 세거지로 고부 두승산 남록에 이정승 묘 등이 있습니다. 공의 이상 세계는 없으니 고려시대의 사성입니다. 단, 공의 형 이경선(李敬先)이 있어 첨의정승 일원랑이니 파계무거하여 별보에 기재하였습니다. 문헌은 고려사 세가별전, 동국유현록, 한국성씨대관, 한국인의 족보에 있습니다.
순종 후 무진1928년 5차 수보 시에 전북 부안군 줄포면 목상리 561번지 산에 사단비를 설립하고 승지 안동 김녕한(金寗漢)이 비음기를 찬술 고부읍지 부안읍지 제단편에 상세히 기록하고 1969년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 산6에 16세손 고려9충신 중랑장 초(初)공의 단묘영역 서편 국도변에 세적비를 건립, 그후 1989년 문학박사 류재영(柳在泳)이 비문을 찬술 신도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원래의 정읍현은 조그만 소읍이었으나 고부는 삼국 이래 서해안의 요진으로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부는 마한 시대 고비이국으로 추정되는 지역이요, 백제시대에는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고사성이 있던 곳으로 고사부리군의 관청이 정치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하여 757년 신라 경덕왕16년에 비로소 고부로 일컬었습니다. 서기 936년 고려 태조19년에는 고을 이름을 영주(瀛州)로 개칭하고 관찰사를 두었으니 이때 정읍, 태인, 인의, 고창, 흥덕, 부안 등 고을이 영주에 속하였으며 그 터가 현 고부면 입석리입니다. 951년 고려 광종2년에는 안남이라 일컬었고 도호부를 두였으며 1019년 고려 현종 10년에 다시 고부로 개칭하고 고을터를 고부리 성황산으로 옮겼습니다.
1894년 고종 31년 갑오동 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1914년 4월1일 군 통폐합에 의해 정읍군에 속하고 현재 고부면이 되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부이씨는 22,891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fJCqE4b_q50?si=atDb2Ke8zPrDRM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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