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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벽진 이(李)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벽진이씨
성씨 : 이(李)
작품명
조각가
조형물 번호 : 63
벽진이씨
성씨 : 이(李)
작품명
조각가
조형물 번호 : 63
그럼 이제 벽진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悤言)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시조입니다. 신라말 벽진군(碧珍君)을 다스리고 있을 때 도둑의 무리가 충척하였으나 벽진장군이 성을 튼튼히 하고 굳게 지킴으로서 백성들이 평안하였다고 하죠. 이에 고려 태조가 사람을 보내 함께 협력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효유하니 벽진장군이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아들 이영(李永)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따라 토벌에 임하게하니 그 때 이영(永)의 나이가 십팔세였습니다.
이를 착하게 여긴 태조가 이대광사도귀녀처지(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이총언(李悤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배(拜)함과 동시에 방읍(傍邑) 229정호(二百二十九丁戶)를 가사(加賜)했습니다. 또 충주(忠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하사했죠. 또한 태조 왕건은 이총언에게 "백자천손 대대로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벽진장군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고성(孤城)으로, 신라와 후백제의 필쟁지지에 있으면서 흘연히 동남(東南)의 성원이 되었죠. 고려 태조 이십일년(938年)에 졸하니 향년 팔십일세였으며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李永)입니다.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태조왕건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 등 명문거족으로 번성한 벽진이씨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죠.
벽진이씨 가문은 바다도 감탄했다는 견금여토(見金如土: 금을 보기를 흙같이 알라)로 유명한 조선시대 대표 청백리 이약동을 비롯하여, 맑고 깨끗하여 티가 없는 사람이라 여겨 고종이 영옥(永玉)으로 호를 내린 이극송과 조선말기 거유 이항로를 배출했습니다.
이렇듯 본관을 벽진(碧珍)으로 하여 자손들이 세계를 계승하여 오면서 역대 현조가 문한(文翰)과 도의(道義) 혹은 충절(忠節)과 청백(淸白)으로 전통을 연면(連綿)히 이어왔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벽진이씨는 109,267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를 착하게 여긴 태조가 이대광사도귀녀처지(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이총언(李悤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배(拜)함과 동시에 방읍(傍邑) 229정호(二百二十九丁戶)를 가사(加賜)했습니다. 또 충주(忠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하사했죠. 또한 태조 왕건은 이총언에게 "백자천손 대대로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벽진장군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고성(孤城)으로, 신라와 후백제의 필쟁지지에 있으면서 흘연히 동남(東南)의 성원이 되었죠. 고려 태조 이십일년(938年)에 졸하니 향년 팔십일세였으며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李永)입니다.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태조왕건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 등 명문거족으로 번성한 벽진이씨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죠.
벽진이씨 가문은 바다도 감탄했다는 견금여토(見金如土: 금을 보기를 흙같이 알라)로 유명한 조선시대 대표 청백리 이약동을 비롯하여, 맑고 깨끗하여 티가 없는 사람이라 여겨 고종이 영옥(永玉)으로 호를 내린 이극송과 조선말기 거유 이항로를 배출했습니다.
이렇듯 본관을 벽진(碧珍)으로 하여 자손들이 세계를 계승하여 오면서 역대 현조가 문한(文翰)과 도의(道義) 혹은 충절(忠節)과 청백(淸白)으로 전통을 연면(連綿)히 이어왔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벽진이씨는 109,267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MrzXlyk4BOQ?si=cPzQHvdsMFrNw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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