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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원주 이(李)씨(신우)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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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원주 이(李)씨 (신우)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원주이씨(신우)
성씨 이(李)
작품명 탄생
조각가 장 건
조형물번호 62

먼저 원주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원주이씨 조형물은 가문을 상징하는 글의 내용과 사람의 이름을 수록하도록 앞에 1면과 뒤편에 2면으로 3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개의 면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며, 3개의 기둥은 힘의 중심을 상징하죠. 원주이씨 가문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모태와 같은 탄생의 중심을 의미하죠. 우주의 중심에서 탄생된 원주이씨 가문을 상징합니다.
탄생을 표현하기 위한 조형적인 언어이죠. 원주이씨 가문의 영원과 전체성을 상징합니다. 산스크리스어로 球라는 뜻의 '만다라'는 지혜와 진실의 뜻을 담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원주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원주이씨(原州李氏)는 신라개국공신 표암공 이알평(李謁平)을 비조로 모시고, 고려 초엽 이신우(李申佑)는 병부상서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경흥군에 봉작되어 호장으로 원주(原州)에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경주(慶州)에서 분관하였습니다.

이신우(李申佑)는 삼파 후손을 두었는데 경원군(慶原君), 강릉공(江陵工),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으로 나뉘었죠. 경원군 이반계(李攀桂)는 고려 공민왕조에 신호위 영중랑장 예부상서에 이르러 고려가 국운이 다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七十二현의 한분이며 운곡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원주 치악산 아래 사전리로 은둔하였습니다.

태종과는 구의가 있어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불응하고, 왕의 행차 문전에 당도하니 나가지 않고 음약단설하고 절사하였죠. 태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에 봉작하고 충절이라 시호를 내렸습니다. 경원군의 유적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황직동 계좌에 모셔있습니다.

경원군은 아들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이(耳)는 대제학공파, 차남 견(肩)은 정산공파, 삼남 요(瑤)는 파주공파, 사남 족(足)은 산음공파입니다. 경원군의 아우 봉예공 이을계(李乙桂)의 손자 강릉 대도호부사 이영화(李英華)는 단종이 폐위되니 벼슬을 버리고 전남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로 낙남하여 아들을 육형제를 두었는데 맹건(孟健), 충건(忠健), 인건(仁健), 의건(義健), 예건(禮健), 지건(智健)입니다.

강릉공의 증손 충정수사 계정(繼鄭) 장군은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공을 세우다 전사하였습니다.계정 장군의 유물은 해남 묘동 지방문화재 159호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죠. 왜란 당시 수사공 외 여덟분의 충신은 증손 회령부사 숙형(淑亨), 현손 훈련판관 대행(大行), 현손 훈련원판관 호(琥), 현손 훈련원부장 황(璜), 현손 직장 순(珣), 현손 병조참판 원해(元海), 현손 의주부윤 준(浚), 오대손 훈련원주부 성춘(成春)으로서 이상 아홉충신은 영산사에 배행되었죠.

현손 문길(文吉), 아들 광일(光一), 손자 신언(愼言) 三세의 효행을 드높여 세상에 시범코져 숙종 갑오 1714년에 작설(綽楔)을 세우는 은전을 내려 효자문은 현재에 이르고, 시조 이신우(李申佑)의 차손 민개(民介)의 十二세손 판도판서 천명(天明)의 후손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주이문의 자손은 선조들의 충의와 절의를 바탕으로 후손들은 의리, 효행, 화합의 정신으로 웅비의 자손이 되길 바랍니다. 원주이씨 인구는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85,562명으로 파악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aa5I6xkzSQ_awn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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