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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거창 신(愼)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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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거창 신(慎)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거창신씨
성씨 신(慎)
작품명 일 출
조각가 신 학 범
조형물번호 49
먼저 거창신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조형물은 바다에서 해가뜨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거창신씨 가문이 영원히 번창함을 상징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거창신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거창신씨의 시조는 신 수(慎修)입니다. 중국 송나라에서 1068년 고려에 사신의 일원으로 왔다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었죠. 고려사에 의하면 신수는 학식이 매우 높고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관직이 사도에 이른후 돌아가셨죠. 국왕은 시호를 공헌(恭獻)으로 하사하였으며 이후 거창 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 이르게 되었습니다.

2세조 신안지(安之)가 병부상서가 되면서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후 7세조 신집평(執平)이 신호위대장군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다 전사했는데 얼마후 조정이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신문은 반원파로 지목되니 8세조 신성(成)이 거창으로 낙향하여 본관을 거창으로 삼게 되었죠.

거창신씨 가문은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13세조 신이충(以衷)이 참판공 신기(幾), 서령공 신언(言), 양간공 신전(詮) 등 세 아들을 두어 삼형제가 파조(派祖)가 된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죠. 조선이 개국된 후 많은 선조가 등과(登科)하여 거창신문은 다시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크게 융성하였죠.

15세조 신승선(承善)은 세종대왕의 손녀사위가 되었을 뿐 아니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따님은 연산군비에 오르고 아드님 신수근(守勤)은 좌의정이 되었으며 훗날 손녀가 중종비(단경왕후)에 오르면서 유명한 치마바위 전설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선조를 모신 서원과 사당은 유림에 널리 알려진 거창의 구연서원, 영암의 송양사 외 다수가 있습니다. 대전의 갈마공원에는 23세조 신유천(惟天)공에게
숙종대왕이 내린 효자정려가 있죠. 이는 선조들이 조정의 중신으로 나라에 봉사하였을 뿐 아니라 충효사상을 드높이고 학문에도 전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후손들을 숙연하게 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거창신씨의 인구는 51,153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tx_wDMd4i4XQrl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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