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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용인 이(李)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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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용인 이(李)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용인 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비상(飛翔)

조각가 백승업(白承業)

조형물번호 25

먼저 용인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용인이씨의 조형물은 전통적인 충과 효 그리고 우(忠孝友)의 얼을 봉황(鳳凰)이 감싸 안고 무한한 우주공간 속으로 날아오르려는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용인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용인이씨의 시조는 이길권(李吉卷)으로 고려 초에 개성(開姓)하여 조선조를 거치면서 그 후손들이 일천여년 간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면서 명문의 맥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 충효우(忠孝友)의 가문입니다.

시조 이길권은 신라 헌강왕 6년 서기 880년에 용인에서 탄생하여 천성이 강직하고 도량이 활달하며 학문을 즐겨 천문지리에도 능통했습니다. 시조는 용인의 토호(土豪)로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그 공로로 식읍(食邑) 500호와 산성군(山城君)에 봉군했으나 원래 청렴 겸양하여 이를 정중히 사양하였죠.

이에 왕건은 그 덕을 더욱 높여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駒城伯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太師)의 벼슬을 내리고 사후에는 조정에서 그의 공을 기려
안의(安毅)공의 시호를 내리고 그가 살던 용인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시죠 묘(墓)는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산 8번지 자은교촌 마을 뒷산이었으나 실전(失傳)되어 용인이씨 시조 발상지 비(發祥址碑)만 세워져있으며 대전 뿌리공원내에는 봉황이 창공을 향하여 힘차게 비상(飛翔)하는 형상의 용인이씨 유래비(由來碑)가 건립되어 있죠.

고려 말에 이르러 중시조 이중인(中仁)은 문하시중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장남·장손과 함께 삼대불사(三代不仕)의 고결한 충절을 지켜 절신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후손들이 올리는 시향 외에도 의정부시 민락동의 송산사(松山祠)와 파주 탄현 소재 고려대전(高麗大殿)에서 그의 정충대절의 얼을 기리는 추모제향을 각기 매년 봉행하고 있죠.

용인이문은 조선조에서 대과에 86인이 급제하는 등으로 더욱 융창 발전하여 3정승(政丞), 17판서(判書) 등 명공거경(名公巨卿)과 수많은 고관대작이 배출되어
명문 중 명가반열에 오른 대표적 청요직(淸要職) 가문이 되었죠.

한편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어머니인 용인이씨(1480~1569)는 효녀이고 열부(烈婦)로서 그의 딸을 오만 원 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탄생(誕生)시켰고, 외손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대성(大成)에 지대한 공헌 등으로 용인이씨 문중이 낳은 현모양처의 참 여인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용인이씨는 가계가 오래되고 이름난 조상들의 음덕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의 벼슬 등이 끊이지 아니하니 과연 대성(大姓)이로다” 라고 극찬한 것은 용인이씨 가문의 큰 자랑이라 할 것입니다(뿌리공원 유래문 인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용인이씨의 인구는 총 36,306명으로 파악되었습니다.

https://youtu.be/ZPSIroqip_4?si=9U-KsOZBA9IrnY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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