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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기계 유(兪)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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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계 유(兪)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기계유씨
성씨 유(兪)
작품명 천년의 문
조각가 고재선
조형물번호 236

 

먼저 기계 유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기계유씨 가문의 충절과 중용, 청족의 선비 기품을 이어온 문중의 역사를 조형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두 개의 좌우측 조형은 만남과 화합, 문중의 단합된 힘을 형상화한거죠.
작품 중앙의 열린공간은 선대로부터 후세에 이르기 까지의 소통을 의미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기계유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신라 때 아찬(阿飡)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그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자 태조가 미워하여 기계현(즉 경주에 속한 현)의 호장(戶長)으로 좌천시켰습니다.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본관을 기계(杞溪)로 삼았죠.

기계유씨 세거지인 경북 포항시 기계고현에 시조 유허지(遺墟地)가 있습니다. 기계(杞溪)는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때 기계현으로 개명하여 의창군(義昌郡)이 되었죠. 1018년(현종 9년)에 경주군(慶州郡)에 속했다가 후에 폐현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영일군(迎日郡)에 편입되었다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로 편입되어 기계면이 되었죠.

그 후 기계유씨는 월성군파, 동정공파, 주부공파, 탐진공파, 전서공파, 판사공파, 부정공파, 부제학공파, 통덕랑공파, 처사공파, 석청공파, 신계공파, 단성공파, 충목공파, 진사공파 그리고 자산공파 등 열여섯 지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계유씨는 호장공 유의신(義臣) 이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까닭에 고려전기에는 대체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그 후손의 일족이 경기도 남쪽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유득선(得瑄)은 좌복야 벼슬에 올랐고, 유선(僐)은 봉익대부판도판서, 유석(碩)은 사헌시사, 유승계(承桂)는 봉익대부판도판서에 올라 3대가 크게 현달하여 기계유씨는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죠.

유석(碩)이 탐진군에 봉해진 아들 유보(寶), 유승계(承桂)는 전서에 오른 아들 천경(千慶), 군기시판사 성리(成利), 부정에 오른 성보(成保), 판사재감사 성복(成福) 등 4형제를 두어 번창하기 시작했죠.

조선조에는 수많은 분들이 가문을 빛냈으며 85명의 문과(文科) 급제자와 45명의 무과(武科) 급제자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생원시 98명, 진사시 190명 등 288명의 소과(小科)급제자와 90여명의 음관(蔭官), 3명의 상신(相臣) 등을 배출하였죠.

구한말(韓末)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개화의 선구자 구당 유길준(吉濬), 광복 후 새 정부의 헌법을 기초한 현민 유진오(兪鎭午) 박사는 의절의 가문인 기계유씨를 더욱 빛냈습니다.

일가들은 부디 선조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충효정신을 새기고 실천하며 이 곳 뿌리공원에 모셔진 각 문중과 함께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다짐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198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기계유씨의 인구는 남한에 9만7천여명, 2000년 11만3천여명, 2015년에는 13만9천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ts4VRdo2O5U?si=WzyPy_N4dt133E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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