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주가(賈)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소주 가씨
성씨 가(賈)
작품명 소주가씨
조각가 라인철
조형물번호 199
먼저 소주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역사적으로 볼 때 소주가씨는 나라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개개인의 안위나 가문의 안위 보단 충절을 지키기에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절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그 조상의 모습 속에 담긴 충절의 모습을 주제로 대나무의 상징인 절개, 인내, 충절의 뜻을 담았죠. 후손들이 그 조상의 얼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대나무 어린 죽순에 긴 의미를 형상화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소주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소주가씨 중시조 가유약(賈維鑰)은 명(明)나라 신종(神宗)때 서기1592년(선조26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명병부랑중겸감찰사(皇明兵部郞中兼監察使)로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 안주, 남원, 동래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5년에 귀국하였습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인 유격장군 가상(賈祥) 손자인 병부종사관 가침(賈琛)과 함께 다시 파병되었죠.
가상(賈祥)은 소사평(素沙平)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동래에 이르러 적에게 전사하고 아들을 구하려던 가유약도 부산전투에서 전사, 1598년(선조32년) 부자가 애통하게도 순국하였습니다.
손자 가침(賈琛)은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에 조부와 부의 장례를 모시고 머물다가 이후 아들 가성(賈晟) 형제들과 충과 효의 예를 다하기 위해 귀국을 하지 않고, 고국과 가까운 태안반도로 왔으며 이 곳에서 귀화 정착하였으니 3대(代)의 출정(出征)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래가 없는 충효의 전형이었습니다.
후세에 조정에서 이충일효(二忠一孝)의 공을 인정하여 1851년(철종2년)에 사우(詞宇)와 정문(旌門)이 하사되어 충남 태안군 남면 적돌길 415번지에 숭의사(崇義祠)를 건립 매년 음력 10월 14일 대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소주가씨의 인구는 8,798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aKaBS6qFA-WXu3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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