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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광주 김(金)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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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주 김(金)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광주 김씨
성씨 김(金)
작품명 번영과 화합
조각가 김복규
조형물번호 194

 

먼저 광주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광주김씨 조형물 상단의 힘차게 상승하는 모습은 빛내주신 선조의 행적, 시조로부터 지내온 위인들의 업적과 미래 후손의 발전을 위해 "장군"의 형상으로 표현하였죠.

 

전체적인 형상은 조상을 높이 받들고 종친의 발전을 바라는 모습으로 광주김씨 가문의 랜드마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문중의 위상과 기개를 초석삼아 현재까지 이어오는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아 가문의 영광을 후대에도 자자손손 널리 뻗어 나아가는 문중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광주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광주김씨(廣州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5자 의성군 석(義城君 錫)의 7세손인 녹광(祿光)공이 상장군으로서 고려 고종 23년 광주군(廣州君)에 봉작됨에 따라 관향으로 발상하였습니다. 2세 김굉(閎)은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3세 김훤(晅)은 고려 후기의 명유(名儒)로서 문하찬성사로 현달하였습니다.

찬성공의 장자는 김남물(南物)이요 증손 김곤수(昆壽)의 장자 김차문(次文)은 공조 참의로, 참의공의 아들 김경보(敬寶)는 상주목사로 제수되었습니다. 목사공의 증손 김기(琦)는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동래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여 어모장군 훈련원정에 증직되었으며 목사공의 다른 증손 김우정(禹鼎)은 왜란 당시 포로가 되어 적지에서도 8년 동안 절의를 지켰고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참의공의 아우 김차무(次武)는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제수받았으며 승지공의 아들 김려(礪)는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고 밀양 지방에 세거하게 되었습니다. 판결공의 장자 김희증(希曾)의 아들 김태허(太虛)는 임진왜란 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1등공신과 경상좌·우도병사, 충정병사, 도총관, 호위대장을 거쳐 지충추부사에 이르고 양무(襄武)란 시호를 받았죠.

양무공의 아들 김수겸(守謙)도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 중추부사를 역임했습니다. 판결공의 차자 김희로(希魯)의 아들 김태을(太乙)은 은덕궁행(隱德窮行)의 석유(碩儒)이며 태을의 차자 김수인(守訒)은 성균생원으로서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홀로 궐하에서 전은소를 올리고 석고대명하였으나 비답이 없으매 “명륜당상 미명륜”(한자)이란 시를 남기고 낙향한 유현(儒賢)입니다.

찬성공의 차자 김개물(開物)은 황해지방을 세거지로 삼았으며 아들 김섬(銛)의 6자 김필수(筆壽)는 고려말 부제학으로서 조선이 개국함에 불사이군의 정절로 은거하여 후손이 덕천지방에 세거하게 되었죠. 곽산 능한성에서 순절한 김옥경(玉京)의 후예가 정주 · 영변에 세거하였고, 관서지방으로 북상한 3세 김태(兌)를 중시조로 하는 일족이 철산지방으로 이주하여 세거하였습니다.

절의와 효제를 대대로 지켜온 명문으로서 근대에는 김상윤(相潤) 김영복(榮宓) 김규환(奎煥) 김석창(錫昌) 김승문(勝文) 김용능(用能) 김진성(振聲) 등이 각기 항일 독립운동에 순국하고 혹은 헌신하여 국가가 서훈하였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주김씨의 인구는 28,156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BHeiCg-agqqumU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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