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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영양 김(金)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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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양 김(金)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영양 김씨
성씨 김(金)
작품명 염원의 꿈
조각가 김재기
조형물번호 189

 

먼저 영양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영양김씨의 상징탑으로서 조선의 가장 큰 정문의 역할과 동시에 화기를 막고자 세워진 숭례문의 형태를 형상화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양김씨의 무궁한 발전과 후손들의 광명과 보은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문의 양쪽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은 성자는 비록 달리하나, 그 시조는 같은 영의공의 후손인 김, 남, 양씨를 상징하며 두 마리의 승천하는 용은 두 성자를 하나로 화합, 단결하여 포용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손들의 무궁한 번영과 성장을 도모하고 영원한 미래를 지향할 수 있도록 용이라는 영적인 동물을 통하여 시각적 효과를 부각시켜 제작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영양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영양김씨의 시조는 김충(金忠)이며 당(唐)나라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벼슬은 이부상서에 이르렀습니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안렴사(按廉使)로 장자(長子)김석중(錫中)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환하던 중 동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영덕군 축산면 해변에 표박하였습니다.

경덕왕이 이 사실을 당에 알리니 당 현종은 ‘부자의 생존은 하늘이 도운 것’이니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살도록 하라고 하였죠. 공의 부자가 신라에서 살기로 결정하니 이에 경덕왕은 공이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도 민(敏)으로 개명하여 영양을 식읍지로 하사하고 영의(英毅)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영의공을 배종한 맏아들 복야(僕射) 석중(錫中)은 본래의 성 김씨를 그대로 받아 새로 자리잡은 영양 고을 지명을 따라 본관을 영양으로 하였습니다. 영양김씨와 남씨 두성은 비록 성은 다르나 시조는 같은 영의공입니다.

고려조에 첨의참리 상호군을 지낸 김충황(忠晃)을 기1세(起一世)로 세계하여 후손들은 영양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율곡선생에게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이 계셨다면 퇴계 선생에게는 훌륭한 할머니 정부인 영양(英陽) 김씨가 계셨죠. 퇴계 선생이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할머니는 어린 퇴계를 자애로 기르면서 항상 학문에 힘쓰며 바르게 살아가도록 가정 교육을 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퇴계가 직접 지은 할머니 묘갈명에 잘 나타나 있으며 위대한 학자 퇴계를 길러 낸 할머니가 바로 영양김씨(英陽金氏) 11세손 부사직(副司直) 김유용(有庸)의 따님입니다.

우리 영양김씨는 유구한 세월 동안 조상의 덕업을 기리면서 인륜대도를 꿋꿋이 지켜온 문중으로 앞으로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또한 영양김씨는 1998년부터 인터넷족보를 국내외적으로 최초로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으니 후손들은 많은 이용을 바랍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양김씨의 인구는 8,779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39WspMib8XKiqd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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