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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남양 홍(洪)씨 선행 토홍의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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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남양 홍(洪)씨 선행 토홍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남양 홍씨(선행)

성씨 홍(洪)

작품명 비상

조각가 조보환

조형물번호 159

 

가문의 화평과 단결을 기반으로 자손만대에 풍요와 번영이 가득하길 기원하는 작품이죠. 이 작품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상징성이 강한 추상적 이미지의 표현으로 간결하지만 함축적이고 효율적으로 디자인 되어진 작품이죠. 중앙의 큰 원형은 선조로부터 지켜온 이 땅을 상징하고, 그로부터 방사형으로 빛처럼 퍼져 나오는 음각은 자손의 비상을 그리고 윗쪽의 양각은 5개파를 상징하고 조상에게서 오는 은총과 영광을 표현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양홍씨(선행)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남양홍씨는 2개 대계보(大系譜)로 나뉘어지는데, 본 토홍계는 경기 남양에 세거한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 금오위위별장동정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오고 있죠.

 

남양홍씨는 고려말 공조전서를 역임한 홍덕의(德義)와 조선조 초에 호조참판을 지낸 홍자경(子儆)을 필두로, 관찰사를 지낸 홍익생(益生), 좌수사를 지낸 홍귀해(貴海), 주부공을 역임한 홍귀호(貴湖), 대호군을 역임한 홍귀연(貴演)과, 홍귀해의 아들 홍형(泂). 홍식(湜). 홍한(瀚)이 문과에 연벽(聯壁)했다.

 

홍형은 부제학, 홍식은 좌승지, 홍한은 이조참의가 되어 가문을 빛냈으나, 연산 갑자·무오사화에 화(禍)를 입고 가장문적(家藏文籍)이 모두 소실되었다. 홍귀연의 아들 홍숙(淑)은 정난공신에 책록되고 당원군에 봉작,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장민(莊敏)이다. 홍형의 아들 홍언필(彦弼)은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났으며 사궤장(賜?杖)하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아들 홍섬(暹)은 문과 장원하여 선호당(選湖堂)· 입기사(入耆社)하고 영의정을 3회에 걸쳐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홍담(曇)은 5개조(五個曹)의 판서를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한 후에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홍주목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워 청난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영원군에 봉작된 가신(可臣)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23명, 시호 받은자 13명, 봉작위자 12명, 청백리 3명을 배출했다. 학사공 홍익한(翼漢)은 장원급제하고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 청나라에 잡혀가 순절한 충신열사이다. 가신의 손자 홍우량(宇亮)은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홍대용(大容)은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기화설을 주장한 실학의 선구자이다.

 

항일투사 홍사구(思九)는 을미사변시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격전 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항일열사로 추앙을 받았다. 봉선화 작곡자인 난파(蘭坡) 홍영후(永厚)는 현대음악의 선구자이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의 영웅 홍대선(大善)은 황해도 순위도에서 피난민 840명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이를 기리고자 유도탄고속함을 제작 『홍대선함』으로 명명(진수)하여 현 해군의 사표(師表)가 되어 빛나고 있다.

*남양홍씨 선행 토홍계 인구는 2000년 9,250가구 30,662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yOizR_f9SrU?si=9vgokTebmd0mrib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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