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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강릉 최씨(江陵 崔氏),본관, 시조 최필달 최흔봉 최문한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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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성씨 밴드페이지 & 유튜브 채널과 협업 중인 (사)한국뿌리문화보존회 / 한국성씨총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780여 개 성씨(본관)의 유래를 시리즈로 연재하여 소개합니다.

*2015년 통계청 실시 인구총조사(매 15년마다 실시):
-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 : 49,705,663명
- 5인 이상의 성씨 본관 : 532개
- 기타 : 91,10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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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성씨

한국인의 성씨와 인물, 사적 등에 관한 이야기 *한국인의 성씨 채널은 매주 새로운 영상 업로드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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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최씨,시조 최필달 최흔봉 최문한,강릉최씨 본관

강릉최씨 시조 및 강릉최씨 본관의 유래
강릉(江陵)은 강원도 영동(嶺東) 지방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상고시대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개칭하여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였다. 550년(진흥왕 11)에 신라의 영토가 되어 선덕여왕(善德女王) 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태종무열왕조(太宗武烈王朝)에 하서주(河西州)로 개편, 경덕왕(景德王) 때는 명주(溟洲)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동원경(凍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으며 940년(태조 23)에 다시 명주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는 처음에 하서부(河西府)로 하다가 986년(성종 5)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개칭하고 두에 목(牧)으로 하였으며,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0도(道)로 나눌 때 삭방도(朔方道)의 중심지가 되어 함경도를 비롯한 영동 일대와 영서(嶺西)의 춘천(春川) 이북등지를 관할하였다. 1179년(명종 8) 연해명주도((沿海溟洲道)로 개칭하고 원종조(元宗朝)에는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강릉도(江陵道)로, 충렬왕(忠烈王) 때 강릉부(江陵府)로, 공민왕(恭愍王) 때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우왕(禑王) 때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하다가 공양왕(恭讓王)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강원도로 개칭되어 세조(世祖)가 진(鎭)을 설치하였고, 1666년(현종 7) 원양도(原襄道)로 고쳐 강릉현(江陵縣)으로 가능하였으며, 정조(正祖) 때 원춘도(原春道)라 하다가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이 되어 21개 면(面)을 관할하다가 1931년 강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고, 1955년 9월 1일 성덕면(城德面)과 경포면(鏡浦面)을 편입하여 강릉시(江陵市)가 되었다.

강릉최씨(江陵崔氏)는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璧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계통이며,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夫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齎)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이들 각 계통별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洲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 한주(翰注)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洲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들, 필달․숭언․한주는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 <삼군(三君)>이다.

고려 말에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 : 국자생원 안린의 아들)은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명신(名臣)으로 세종(世宗) 때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공양왕 2) 6월 19일 강릉(江陵)에서 태어난 조은(釣隱) 치운(致雲)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德望)과 식견(識見)을 인정받아 국정(國政)을 논할 때마다 왕(王)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明)나라를 다녀오면서 외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은(釣隱)은 왕명(王命)을 받아 「대명률(大明律)」 참고로 「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하여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郡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王)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奴婢)를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는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世宗)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親筆)로 계주(戒酒)의 어찰(御札)을 내려 주었다. 조은은 그 어찰을 벽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대마다 경계하였는데,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욱, 부인이 머리를 들어 주면서 어찰이 붙은 벽을 가리켜 보이면 취중에도 번번이 사죄(謝罪)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잡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現)은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애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머무르다가 세조(世祖)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 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守令)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寧越)과 고성(高城)을 맡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다했다.

1480년(성종 11)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자 여막(旅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예조 참의(禮曹參議)․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경주부윤(慶州府尹)․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한편 응현(應現)의 세째 아들로 1504년(연산군 10)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했던 세절(世節)은 당시 폭군의 난정이 극심하였던 시대라 억울하게도 그 해에 등과(登科)한 이들의 발표가 보류된 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맞았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의 중신이 되어 <신(臣) 등은 등과(登科) 출신으로서, 비록 얼마 안되는 효(效)도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반(文班)의 일원(一員)으로서 갖출 바를 갖추고 그 이력(履歷)을 쌓은 지는 오래입니다. 오늘날 방(榜)을 파(罷)하고 직(職)을 거두어 한 포의지사(布衣之士)가 되었으니 새삼스레 유관(儒冠)을 쓰고 성균관에 나가려 하여도 후배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물러나서 전묘(田畝:밭이랑)에 엎드리려 하여도 평화로운 세상에 버린 물건이 될 것이 뻔하온데…>로 시작되는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올려 왕으로 부터 인정을 받아 장원급제를 추인(追認)받게 되었다.

그 후 성균과 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좌우부 승지(左右副丞旨), 황해(黃海)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형․호조(刑戶曹)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한훤당(寒喧當) 김광필(金宏弼)의 고제(高弟)로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미술․음악 등에 출중(出衆)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웠던 수성 (壽峸)은 어려서부터 의지(意志)와 기개(氣槪)가 남달리 고매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19세 때 이미 문예(文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元兇)이었던 남 곤(南 袞)이 산수도(山水圖) 한 폭을 김 정(金 淨)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구해왔다. 마침 수성이 김 정의 집을 방문했다가 이를 보고 그 위에 쓰기를 <떨어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리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온다, 복건 쓴 서너사람 망천의 주인은 누구인고>라고 하였다가 남 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수성은 시국 형편에 강개하여 승지(承旨)로 있던 숙부(叔父) 세절(細切)에게 “세사가 이같이 되어가는데 굳이 벼슬하여 무엇을 구하고저 하시요. 안전하게 산수간(山水間)에서 여생을 보전하는 것만 못할 겁니다.”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저로 이네,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여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

1519년(중종 14)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일으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수성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끝내 극형에 처해졌다. 1521년(중종 16) 10월 21일 진시(辰時)에 처형되니 이 때 수성의 나이는 35세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날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고 지나가고 하늘이 수 백리가 진동하였다고 하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려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된 지가 수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수성의 제자(弟子) 이달형(李達亨)이 발(簾)로써 시체를 염습하여 산골에 임시로 가매장하고 밤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꿈에 수성이 나타나 <적막한 내 무덤을 뉘라서 찾아오리, 처절한 원숭이 소리나 벗하련다, 발에 싸여 온 후, 멀리 시체 덮어준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하는 시(詩)를 읊었다.

임진왜란 때 28세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배천(配天)은 선조(宣祖)로부터 어의(御衣)와 망건(網巾) 등을 하사(下賜)받고 회령 교수(會寧敎授)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峸)의 손자인 기벽(基鐴)은 광해군(光海君) 때 박사(博士)로서 태학(太學)인 성균관에서 교수(敎授)하고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선조의 아들, 인목대비의 소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江華島)에 위리안치시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페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 하며 극간(極諫)을 하였고, 조카 문한(文漢)으로 하여금 당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抗疏文)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동생 기백(基銆)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향리인 원주(原州)로 내려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억울함이 풀렸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세째 문발(文潑)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珠玉) 같은 시(詩)를 3권 2책에 담은「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나겼다. 막내 문식(文湜)은 1630년(인조 8)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고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후손에서는 그의 12세손 입지(立之)가 고려조에서 문하평리(門下評理)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증직되어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강릉(江陵)에, 차남 안빈(安瀕)은 이부 전서(吏部典書)로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고, 막내 안면(安沔)은 이부 전서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외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던 유연(有漣:안소의 아들)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유의(有漪) 형제가 유명했으며, 유연의 아들 이 (迤)는 조선 초기에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경상도 도관찰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경인(景仁)이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충숙왕(忠肅王)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던 문한(文漢)은 기울어져가는 고려(高麗)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자기를 태우고 동분서주하던 애마(愛馬)가 강릉 옥천동 용지(龍池)에서 용(龍)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고려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그대로 강릉에 정착하여 강릉 최씨의 또다른 계통의 시조가 되었다.

충재공(忠齋公) 문한(文漢)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슬하에 아들 3형제 중 둘째 자호(自湖)는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막내 자점(自霑)은 성종(成宗) 대 등과(登科)하여 감찰(監察)과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평강(平康)․고성(高城)․금성(金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25년(중종 20)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했던 연(演: 자점의 손자)은 호당(湖堂)에 선임되어 사가독서를 했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과 수찬(修撰)․장령(掌令)․필선(弼善) 등을 거쳐 충청도 어사(忠淸道御史)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지낸 후 인종(人種) 때 중종의「애책문(哀冊文)」과「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그 후 명종(明宗) 초에 지중추부사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지의금부사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조카 운우(雲雨)는 명종(明宗) 때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고,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응천(應天)이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음율(音律) 등에 정통하여 문명을 떨침으로써 강릉 최씨를 더욱 더욱 빛냈다.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최씨(江陵崔氏)는 145,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역대 인물은 아래 링크 성씨닷컴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출처: 한국성씨총연합회 홈페이지, 성씨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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