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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충주 박(朴)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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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충주 박(朴)씨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오늘은 충주박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충주박씨
성씨 박(朴)
작품명 家傳忠孝 世守敦睦(가전충효 세수돈목)
조각가 최 영 근 (한남대학교 교수)
조형물번호 1
먼저 충주박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충주박씨 조형물은 시조(박혁거세)의 얼을 표현하여 상단에 박(瓢) 모양을 표현하여 중시조 형제분이 시조왕을 받들어 모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조형물에서 유래비 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오석을 중간에 배열하여 웅장함을 표현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충주박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충주박씨는 신라 시조대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원조로 하고 고려 부정 박영(副正 朴英)을 관조로 하여 1474년 첨정 박원창(僉正 朴原昌) 공이 충주박씨족보를 편찬하였고 이는 현존하는 한국의 최초 족보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11년에 박씨 귀족으로 하여금 국내 주(州)와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여 주주(州主) 또는 군주(郡主)라 하였고 진흥왕 18년에 와서는 충주(忠州)를 소경(小京)이라 하였습니다. 그다음 해에 귀척자제(貴戚子弟)와 육부호민(六部豪民)들을 이곳에 옮기게되니 충주의 토성유래는 신라로부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죠.

불행히 관조 부정공(副正公) 이상은 여러 차례의 병화를 겪어 문적을 잃어버려 알길이 없고 현손 판원사 박덕린(判院事 朴德麟)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3대를 독자로 내려와 부정공 이하 8세의 묘소는 개성 동문(開城 東門) 밖에 모셨 는데 조국분단으로 보존 여부도 알 길이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고려말 조선초 9세에 와서 증 병조참의 박진(朴蓁)과 증 이조판서 박소(朴蘇) 형제가 개성에서 충청도 덕진현 가장골(현 가장동 탑립동)에 서기 1360년경 우거하여 호서의 고반(古班)이 되었으니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가장, 괴정, 도마동이죠.

참의공 박진(朴蓁)은 4형제를 두었으니 효함(孝諴), 충함(忠諴), 제함(悌諴), 신함(信諴)이며 그 후손들은 제천, 황간, 영동, 김천, 군산, 연산, 공주, 은진, 유성, 장수, 용안, 여산, 나주, 시흥, 용인, 홍성, 대전, 침산동, 가장동, 내동, 괴정동, 금산, 청주, 개성, 광주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서공 박소(朴蘇)는 5형제를 두었으니 인흥(仁興), 의흥(義興), 예흥(禮興), 지흥(智興), 신흥(信興)이며 그 후손들은 홍원, 청진, 회덕, 맹산, 광주, 송정, 나주, 고창, 고부, 보성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죠.

충주박씨는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돈목(世守敦睦)의 가훈을 6백여년간 지켜 오면서 도학문장(道學文章)과 충효절의를 대대로 배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충주박씨의 인구는 총 34,226명으로 파악되었습니다.

https://youtu.be/NSu8QV_2Bu8?si=fSfuwJac3Gi299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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