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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선산 김씨(善山金氏) 시조, 김추(金錘), 선산김씨 조상인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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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김씨시조(善山金氏),김추(金錘)선산김씨조상인물

 

선산김씨(善山金氏)의 연원과 유래

모든 신라김씨(新羅金氏)는 씨족의 근원을 신라초기 태보공(太輔公) 김알지(金閼智)가 서라벌의 시림(始林)에서 탄강(誕降)한 시점으로하여 경순왕(敬順王)까지 28代를 계승(繼承)하였으며 고려조 조선조(高麗朝 朝鮮朝)를 거쳐 250여 종파로 분관(分貫)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라김씨는 만백성의 선두에 서서 신라 천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 발전시키고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偉業)을 달성케한 씨족(氏族)이다.

선산김씨는 신라왕실의 후손(後孫)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제8자(子)이며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외손자(外孫子)인 상서령, 일선군(尙書令, 一善君) 김추(金錘)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선산(善山)으로 삼았다. 그리고 후대에 삼척(三陟), 온양(溫陽), 희천(熙川), 진주(晉州), 원주(原州)로 분관(分貫)하여 계승(繼承)한다.

고려시대 선산김씨는 크게 성창(盛昌)한 명문사족(名門士族)이다. 많은 분이 봉군(封君)되고 시호(諡號)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경 장상(公卿 將相)을 배출하여 명문대가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예(後裔)들은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세거(世居)하면서 고려의 융성(隆盛) 발전에 지도적 역할(指導的 役割)을 다하여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고려말엽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지낸 16세(世) 김 문(金 文)은 슬하(膝下)에 4형제를 두었는데 이로부터 선산김씨는 4대 계파(系派)를 이룬다.

장자(長子)인 김성원(金成元)은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으로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파조(派祖)가 되었고 그 아들 김기(金起)는 정순대부 광주목사(正順大夫 廣州牧使)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화의군(和義君)에 봉(封)하여젔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은거 종신(隱居 終身)하였다.

화의군(和義君)의 현손(玄孫) 이조참판 김광좌(吏曹參判 金匡佐)는 슬하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 별제 김취기(別提 金就器) 교위 김취연(校尉 金就硏) 찰방 김취련(察訪 金就鍊) 문간 김취문(文簡 金就文) 참판 김취빈(參判 金就彬)으로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6파(派)로 나뉘어져 현재에 이른다.

이를 기점(起點)으로 화의군(和義君) 자손(子孫)들은 선산(善山)을 중심으로 세거 번성(世居 繁盛)하며 후손들이 유행(儒行)을 닦고 절의(節義)를 숭상(崇尙)하고 수많은 자손(子孫)들이 문무(文武) 대소(大小)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고위관직(高位官職)에 등용(登用)되었으며 사대부(士大夫)의 명문(名門)으로 경향(京鄕)에 그 명성(名聲)을 떨쳤다.

둘째아들인 판서공파조 김성부(判書公派祖 金成富)는 고려조 전의부정(典醫副正)을 지내고 조선개국 원종공신(原從公臣)에 책봉(冊封)되어 벼슬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왕위(王位)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이거(移御)할 때 호종(扈從)하였다가 태조(太祖)가 환도(還都)할 때 복귀(復歸)하지 않고 함경도 길주(咸鏡道 吉州)에 정착(定着)하였다. 그 아들인 김경도(金敬道)는 조산대부 밀양교수(朝散大夫 密陽敎授)를 지내고 그 후손들은 함경도 단천 고읍(端川 古邑)을 중심으로 길주(吉州), 성진(城津), 이천(利川), 풍산(豊山), 북청(北靑), 홍원(洪原), 등(等)에 산거(散居)하며 많은 자손들이 관직(官職)에 나아가 문중(門中)을 빛냈다.

광복(光復)이후에는 국토의 분단으로 연락이 두절(杜絶)되고 남하(南下)한 이만여 종인(二萬餘 宗人)만 남종(南宗)과 연락(連絡)되어 대동종친회(大同宗親會)를 중심으로 종사(宗事)를 같이 수행(遂行)하고 있다.

셋째아들인 좌의정공파조 김성룡(左議政公派祖 金成龍)은 려말(麗末)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냈고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에 책봉(冊封)되어 벼슬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大匡輔國 崇綠大夫 左議政)에 이르고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에 봉(封)하여젔다. 그의 아들 김탁(金逴)은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벼슬에 나아가 가계(家系)를 유지계승(維持繼承)하고 경기도 이천(京畿道 利川)을 중심으로 산거(散居)하고 있다

넷째아들인 별장공파조 김성여(別將公派祖 金成呂)는 고려말(高麗末) 별장동정(別將同正)에 이르고 그 자손은 평안도(平安道)에 세거(世居)하며 그 아들 김선(金選), 손자(孫子) 김요신, 순신(金堯臣, 舜臣)이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행적(行蹟)은 알지 못하고 있다 .

하나의 조상(祖上), 같은 자손(子孫)인데 하루 속히 연락(連絡)이 닿기를 기대한다.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선산(善山)의 본래의 명칭은 일선군(一善郡)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36년(614년)에 일선주(一線州)로 승격하여 불렀고 제35대 경덕왕(景德王)16년(757년)에 숭선군(崇善郡)으로 고쳐 불렀고 고려 제6대 성종(成宗)14년(1413)에 선산군(善山郡)으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구미시(龜尾市)에 속한다.


선산김씨 집성촌(善山金氏集姓村)

고려말 광주목사(廣州牧使)로 화의군(和義君)인 김기(金起)는 고려사직의 운명이 다 할 무렵 관직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선산 산촌에 자리잡고 은거(隱居)하다 생을 마치고 그 후 현손(玄孫)인 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가 현 선산군 고아읍 원호동, 문성동(善山郡 高牙面 元湖洞, 文星洞)을 걸친 “들성”에 정착하여 들성김씨(善山金氏의 俗稱) 오백년 세거지(世居地)로 명성을 드높혔다. 그동안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들성에는 250여호의 들성김씨의 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해평 배내(海平 舟川), 구미 사창(荊谷), 금릉 조마와 숭산 등에 30~50호의 집성(集姓)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또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성부(金成富)는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태조(太祖)가 함흥(咸興)으로 이어(移御)할 때 호종(扈從)하였다. 사정상 복귀하지 못하고 함경도 길주(咸鏡道 吉州)에 은거(隱居)하다 생을 마치고 아들인 조산대부 교수(朝散大夫 敎授) 김경도(金敬道)가 함경도 단천 고읍(咸鏡道 端川 古邑)에 정착하여 이후 지금의 단천군 가다면 금안리(端川郡 何多面 金晏里)에 150호의 집성(集姓)마을을 이루어 오백년을 세거하여 선산김씨(善山金氏)의 명성을 드높이 살고 있다. 그 밖에 단천군내 이중 광천 신만(端川郡內 利中 廣泉 新滿)등에 30~40호의 집성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역대인물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52

 

선산김씨시조(善山金氏),김추(金錘)선산김씨조상인물

선산김씨(善山金氏)의 연원과 유래 모든 신라김씨(新羅金氏)는 씨족의 근원을 신라초기 태보공(太輔公) 김알지(金閼智)가 서라벌의 시림(始林)에서 탄강(誕降)한 시점으로하여 경순왕(敬順王)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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