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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선산김씨(善山金氏),선산김씨 시조, 김선궁(선궁계 宣弓系), 선산김씨 유래, 선산김씨조상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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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김씨(善山金氏), 선산김씨 시조, 김선궁, 선산김씨 유래, 선산김씨 조상

선궁계(宣弓系)

 

선산김씨(善山金氏) 선궁계(宣弓系)

선산김씨시조 및 선산김씨유래

선산(善山)은 경상북도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신라(新羅) 눌지왕(訥祗王 : 19대 왕, 재위기간 : 417765) 때 일선(一善)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숭선(崇善)․병정현(竝井縣)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 995(고려 성종 14) 선주(善州)로 고쳤고, 1413(태종 13) 지금의 선산(善山)으로 개칭되었다.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궁(金宣弓)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30세손이며, 문성왕(文聖王 : 신라 제46대 왕, 재위기간 : 839857) 8세손이다.

선산김씨족보(善山金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초휘(初諱) 김 선(金 宣)이었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하려 남행(南行)하던 중 숭선(崇善 : 선산의 옛 지명)에 이르러 모병(募兵)할 때 그가 함께 종군(從軍)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친히 활()을 하사(下賜)하고 선궁(先弓)으로 사명(賜名)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공()을 세우고, 개국벽상공신(開國璧上功臣)․영문하시중(領門下侍中)․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지명(地名)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 선산(善山)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후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영남(嶺南)을 중심으로 한 전국(全國)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중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선궁(宣弓)의 맏아들 봉술(奉術)이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종1품 으뜸 벼슬)을 지내고, 둘째 봉문(奉文)은 삼사 우윤(三司右尹 : 삼사의 종3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리고 가문의 중흥을 일으킨 중추적인 기틀을 다졌으며, 봉문(奉文)의 아들 흥림(興林)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그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혁동(赫東 : 대호군 홍림의 아들)과 상장군(上將軍) 임남(任南)․제용(濟用), 태자태사(太子太師) 득충(得忠) 대장군(大將軍) 창서(昌緖)․우( : 삼호군 제용의 증손), 한림학사(翰林學士 :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작성하는 관청의 문필가) 신함(愼緘 : 태자 태사 득충의 손자), 직제학 우류(右鏐), 판밀직부사(判密直府事) 달상(達祥), 판도판서(判圖判書) 남보(南寶), 삼사 우윤(三司右尹) 천부(天富) 등이 뛰어났으며, 감찰(監察) 원로(元老)의 아들 제()와 주()는 충절(忠節)로 유명했다.

()는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있다가 고려(高麗)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동해(東海) 바다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우 주()는 우왕(禑王 : 32대 왕, 재위기간 : 13741388)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올라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동안 통곡(痛哭) 끝에 조복(朝服)과 신을 벗어 사자에게 보내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발길을 돌려 명()나라에 간 뒤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뒷날 형제의 절의를 기려 선산(善山)의 월암서원(月巖書院)과 고창(高敞)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하고, 나라에서는 벼슬과 시호(諡號 : 경상과 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나라에서 추증하는 이름)를 내렸다.


조선조(造船朝)에 와서도 선산 김씨는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학문(學問)과 벼슬로써 명성을 높였다.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인 야은(冶隱) 길 재(吉 再)의 학통을 이어받아 강호산인(江湖山人) 숙자(叔滋)는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의 손자(孫子)로 태어나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19(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 :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겹쳤을 때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여 우정자(右正字)․교수(敎授)․현감(縣監)․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한 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밀양(密陽)에 돌아가서 후진교육에 진력했고, 정주학(程朱學 : 송나라 때의 정 호․정 이 및 주 희 등이 주장한 유학)을 발전시켜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졌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슬하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인 점필재(佔畢齋) 종직(宗直)이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효제충신(孝悌忠臣)을 주안으로 하며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학문을 추구하여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成宗)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門人)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다.

그는 문하(門下)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 위(曺 偉)․김일손(金馹孫)․남효온(南孝溫)․유호인(兪好仁) 등 뛰어난 석학(碩學)과 거유(巨儒)를 배출하였고, 서화(書畵)에도 재질이 뛰어났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5군을 증수(增修)했다.

그가 일찍이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항우(項羽)가 초회왕(楚懷王)을 죽인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풍자한「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바 있는데, 그가 죽은 후 1498(연산군 4)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이것을 사초(史草 : 조선시대 사관이 시정을 적어둔 사기의 원고, 이것들이 뒤에 왕조실록을 편찬하는 원고가 된다.)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호사와(戊午士禍)가 일어나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어 시체를 내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건 극형) 당하고 많은 문집(文集)이 불태워졌으며, 제자들은 모두 학살 또는 유배되는 참화(慘禍)를 입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과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선 중종(中宗) 때 호조(戶曹)를 제외한 5()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응기(應箕) 1513(중종 8)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효원(孝元)은 이퇴계(李退溪)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565(명종 2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들이 임금의 톡명을 받아 공부하던 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의 영수(領袖)로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종비(明宗妃) 심씨(沈氏)의 아우로서 권세가 높던 심의겸(沈義謙)과의 개인적인 대립이 사색당파의 효시가 되어 당쟁이 격렬해지자 본의아닌 사태에 크게 뉘우치고 10년 간 한직(閑職)에만 있으면서 자숙했다고 한다.

그의 아우 이원(履元)은 임진왜란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으면서 흉년으로 굶주리던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고, 경기도 관찰사로 도정(道政)을 바로 잡기도 했으며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막내 의원(義元)도 선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 간쟁과 논박을 맏았던 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올랐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했다.

효원(孝元)의 손자 세렴(世濂)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인조(仁祖) 때 통신부사(通信府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1645(인조 23)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겸 홍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낸 후 만년에는 경서(經書) 연구에 전심하여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자인 현감(慈仁縣監)과 함평 군수(咸平郡守)를 지낸 천일(千鎰)과 영주 군수(榮州郡守)로 치적(治積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을 샇은 경직(敬直)이 유명했고, ()은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70세의 노령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름을 나렸다.

한편 부사(府使) 종필(宗泌)은 호군(護軍) 진흥(振興), 대사간(大司諫) 원섭(元燮), 형조 참의(刑曹參議) 준상(儁相), 호조 참판(戶曹參判) 덕기(德基), 군수(郡守) 호승(鎬承) 등과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엇으며, 학자(學者) 학규(鶴奎)와 의교(義敎)는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을 전통(傳統)으로 한 조선조(朝鮮朝)의 세도가문(勢道家門)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역대인물(歷代人物)-선산김씨조상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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