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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광산김씨(光山金氏) 시조, 김흥광(金興光), 광산김씨 시조, 광산김씨 조상인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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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光山金氏) 시조, 김흥광(金興光), 광산김씨 시조, 광산김씨 조상인물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서기 757(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51대 왕, 제위기간 : 887897)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18(고려 태조 19) 태조(太祖)가 신검(神劒)을 토멸(討滅)하고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1259(고종 46) 기주(冀州 : 일명 기양주)로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현()으로 강등되어 광산(光山)이라 칭하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다시 주()로 승격하였고, 1895 (고종 32) 전국을 23()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光州)가 부()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名門)으로 손꼽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왕실(新羅王室)의 후예인 김흥광(金興光)이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光州)의 서일동(西一洞 : 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隱居)하여 시적(始籍)하게 되었으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정2품직인 평장사(平章事)를 많이 배출하여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 체의 아들 위()와 주영(珠永) 형제대()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광세(光世)와 광존(光存)의 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광세(光世)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그의 아들 경량(鏡亮)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孫子) ()의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주정(周鼎)은 충렬왕(忠烈王)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의 손자인 광재(光載 : 문정공 태현의 셋째 아들)는 공민왕(恭愍王) 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니 왕()이 그의 효성(孝誠)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를 세우게 했다.

 

세종조(世宗朝)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예몽(禮蒙)의 아들 성원(性源)은 세조(世祖) 때「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구(絿)는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 정(金 淨)․김 식(金 湜)․한 충(韓 忠)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란 필체가 생겨났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 구(金 絿)는 중국(中國) 사람들이 자기의 글씨를 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중종(中宗) 때의 우의정(右議政) 극성(克成) 3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경륜과 계책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날렸다.

다시 광존(光存)의 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현손(玄孫) ()이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의 증손(曾孫) 약채(若采)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의 명맥(名脈)이 이어졌다.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약채(若采)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지냈고, 그의 아우 약항(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용재총화」에 보면 약항(若恒)의 아들 처()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時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년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찰사 약채(若采)의 증손(曾孫) 국광(國光)은 성종(成宗)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좌리일등공신(左理一等功臣)으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찌기 익성공(翼成公) 황 희(黃 喜)가 그를 한번 보고 큰 인물로 인정하여 자기 손녀(孫女 : 소윤 황보신의 딸)로서 아내를 삼아 주었고 작게 성취할 사람은 아니다 하고 그를 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

세조(世祖)가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당시의 학문(學問)이 뛰어난 신하를 뽑아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가려내어「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국광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과 무()를 겸비한 재사이다하고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자기 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국광(國光)의 아우 겸광(謙光)은 성종(成宗)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고, 국광의 아들 극뉴(克忸)는 대사간(大司諫), 극복(克福)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한편 겸광(謙光)의 아들 극핍(克愊)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극뉴(克忸)의 손자(孫子) ()는 명종(明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증손(曾孫) 계휘(繼輝)는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계휘의 아우 은휘(殷輝)가 일찌기 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은휘(殷輝)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論責)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전을 빌린일이 있었다)의 고사(古事)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宋翼弼)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滅門)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先祖)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家門)에 명문(名門)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 1548(명종 3)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性理學)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아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親書)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

 

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경서변의(經書辨疑)8, 의례문해(疑禮問解)8,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1,가례집람(家禮集覽)3,「상례비요 (喪禮備要)1권 등 총21권의 저서(著書)는 한국(韓國)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장생(長生)의 예학은 아들 집()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을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의 터전을 삼았다.

1646(인조 24) 산적(山賊) 류 탁(柳 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 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承旨 : 김 집)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경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 하였다.

그는 아버지(장생) 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父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庠)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부인 유씨(兪氏)의 성품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부의 도리를 갖출 수가 없어 마침내 이율곡(李栗谷)의 서녀(庶女)를 얻어 첩을 삼았는데 어질고 여공(女工)을 잘하였다. () 부인이 죽자 그의 아버지 사계(沙溪)는 아들이 상처하였으니 후처를얻어 아들을 낳아서 선대를 계승할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유씨)과 짝이 되어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비록 다시 장가 든다고 하여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읍니까?” 하며 대()를 잇지 못하였다.

한편 이조 참판(吏曹參判) ( : 사계의 아들, 집의 아우)의 아들 익희(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아우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南門)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숙종(肅宗)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주역인 익훈(益勳 : 반의 아들, 익겸의 아우)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의 정권을 다시 잡자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현종(顯宗) 때의 예조 참판(禮曹參判) 익경(益景)은 죽은 인성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갔다.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만기(萬基)와 효자(孝子)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名臣)이다.

특히 만중(萬重)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중종(中宗)의 딸 혜순옹주(惠順瓮主)와 혼인하여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진 인경(仁慶 : 겸광의 증손)과 이 황(李 滉)의 문인(門人)으로 안동(安東) 지방의 학문융성 창도자로 알려진 언기(彦璣)가 유명했고, 전적(典籍) 세우(世愚)의 아들 규는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덕령(德齡)은 충절(忠節)로 가문(家門)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 그는 1567(명종 22) 광주 석지촌(石厎村)에서 붕섭(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性理學)의대가(大家)인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成縣監) 이 귀(李 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의병(義兵)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 율(權 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찌기 이 귀(李 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

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長湍)8서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운(光運)과 두남(斗南)은 진주(晋州)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을 빛냈고, 선조(宣祖) 때 대북(大北)의 지도자였던 질간(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 「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진우(震羽), 호남(湖南) 8문장의 한 사람인 공선(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외 선조(宣祖) 때 포도시(葡萄詩) 로 중국(中國)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영남(潁南)과 숙종(肅宗) 때 예서(禮書)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우형(宇亨 : 공조 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진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내고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두문불출하고 학문(學問)에만 진력했다.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양택(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776(영조 5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상복(相福)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금위대장(禁衛大將) 기석(箕錫)과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지수(志洙) 등이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이었고, 재풍(在蘴)은 친로파(親露派) 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국권(國權)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서 한말 풍운에서 고절(古節) 있는 대인(大人)으로 추앙받았다.

익현(翼鉉)의 아들인 영덕(永德)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죽음으로써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영숙(永肅)과 함께 예의충효(禮義忠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전국에 총 926,3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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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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