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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예천권씨시조(醴泉權氏 始祖), 권섬(權暹),예천권씨 조상인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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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권씨시조(醴泉權氏 始祖), 권섬(權暹),예천권씨조상인물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예천(醴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의 수주현(水酒顯)을 신라(新羅)에서 예천(醴泉)으로 불렀으나 고려(高麗) 때 와서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 2)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묻었다고 하여 기양현(基陽縣)으로 승격되었고, 1204년(신종 7) 에 포주로 하였으나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포천으로 고쳤다가 1416년(태종 16) 에 다시 예천(醴泉)이라 하였다.

예천권씨시조(醴泉權氏 始祖) 권섬(權暹)은 호군(護軍) 흔승단(昕昇旦)의 아들로 본성(本姓) 흔씨(昕氏)였으나 고려(高麗) 충목왕 (忠穆王:제29대 왕, 재위기간:1344~1348) 의 이름이 흔(昕)이었으므로〈국휘(國諱)를 범한다〉고 하여 그의 외가성(外家姓)인 권씨(權氏)로 개성(改姓)한 것이다.
시조(始祖) 섬(暹)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후 전공 판서(典工判書)에 추증되었고, 후손들이 예천지방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관향(貫鄕)을 예천(醴泉)으로 삼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예천 권씨(醴泉權氏)의 가통(加痛)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섬(暹)의 손자(孫子) 상(詳)과 집(諿)이 목사(牧使)를 지냈고, 집(諿)의 아들 맹손(孟孫)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별제(別提) 선(善)의 아들 5형제 중 돌째 오기(五紀)는 연산군(燕山君)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종조(中宗朝)에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 세째 오복(五福)은 1486년(성종 17)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로 호당(湖當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연산군고사본말(燕山君故事本末)」에 의하면 그는 문장(文章)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칭도(稱道)하였고, 김일손(金馹孫)과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교리(校理)로 있다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外任)으로 나간지 3년만에 화를 당하였는데, 흉하고 포악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한 기절을 굽히지 않고 3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참봉(參奉) 오상(五常)의 손자(孫子) 문해(文海)는 퇴계(退溪) 이 황(二 黃)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학문(學問)에 일가(一家)를 이룬 학자(學者)로서 고래(古來)의 서적(書籍)을 참고하여「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했으며, 그의 아들 별(鼈)은 고금(古今)의 사료(史料)로 이용되고 있는「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편술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박학(博學)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권씨는 남한에 총 4,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씨 밴드페이지 & 유튜브 채널과 협업 중인 (사)한국뿌리문화보존회 / 한국성씨총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780여 개 성씨(본관)의 유래를 시리즈로 연재하여 소개합니다.

이 게시물은 서기 2005년 3월 30일자로 <한국성씨총연합회>에서 발행한 [한국성씨총감]에 수록된 내용을 이곳 한국인의 성씨 밴드페이지에 소개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2015년 통계청 실시 인구총조사(매 15년마다 실시):
-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 : 49,705,663명
- 5인 이상의 성씨 본관 : 532개
- 기타 : 91,10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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