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김씨(加平金氏), 가평 김씨 시조
시조
가평김씨(加平金氏)의 시조(始祖) 김계공(金繼恭)은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 : 강릉 김씨의 시조)의 23세손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1506년( 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 성희안․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인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평김씨는 남한에 2,460가구, 7,5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38명으로 조사되었다.
[기획] 한국의 성씨, 가평김씨(加平金氏)
2023-05-30 아시아뉴스전북
[아시아뉴스전북=정복규 기자] 시조(始祖) 김계공(金繼恭)은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23세손이다.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다. 따라서 가평김씨는 강릉김씨와 뿌리가 같다. 김계공은 조선조에서 무과에 등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으로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가평김씨 시조 김계공(金繼恭)의 성씨와 한자 이름까지 동일하고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김계공(金繼恭)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이들 두 김계공은 모두 조선 중종반정과 관련이 깊어 동일인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시조와 다른 사람으로 거명되는 김계공의 실제 본관과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조선 왕실의 내시로 활동하면서 성종·연산군·중종을 연이어 모셨다. 조선 시대 내시는 궁에 거주하는 장번내관(長番內官)과 궁 근처에 거주하며 출퇴근하는 출입번내관(出入番內官)의 두 유형으로 나뉜다.『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김계공은 출입번 내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계공은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중종반정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503년(연산군 9) 연산군의 명으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는 기록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계공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중종이 이례적으로 김계공에게 서반(西班) 관직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것이 선례가 되어 환관 정치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조정 신료들의 만류로 결국 중종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519년(중종 14) 김계공은 조광조(趙光祖) 일파에 의해 유영(柳濚)·이효성(李孝誠) 등과 함께 녹권(錄券)을 받은 자로 지목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그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1동 곱산 내시 묘역에 있다. 조선 시대 내시의 종파 가운데 판곡파 묘역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김계공의 묘표(墓表)와 함께 현종의 내시였던 채이직(蔡以直), 숙종의 내시였던 여기양(呂起陽)의 묘표가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내시는 동성(同姓)·이성(異姓) 여부와 관계없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을 수 있어 판곡파(板谷派)·계림파(桂林派)·장동파(壯洞派)·강동파(江東派)·서산파(西山派)·과천파(果川派) 등 다양한 종파(宗派)로 분파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성희안·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다.
그 뒤 훈구 세력의 횡포가 더욱 심해졌다. 연산군은 이번에는 훈구세력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고자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 연산군의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만들었다.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전국에 채청·채홍사(採靑採紅使)를 보내 미녀를 선발하였는데 이를‘운평(運平)’이라 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를‘흥청(興淸)’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하게 하였다.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해 민원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학정을 비방하는 한글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불태우는 등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심지어는 내연(內宴)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정치는 거의 내시 김자원(金子猿)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거사 계획은 훈구세력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繼妃)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尹大妃)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었다.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곧 중종이다.
이로써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계열로 돌아갔다. 중종 이전부터 문제되어온 훈구·사림 두 계열간의 대립이 재현되었다.
본관 가평(加平)은 경기도 중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서는 근평군(斤平郡) 또는 병평군(?平郡)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조종현(朝宗縣)과 합하여 가평군(嘉平郡)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강원도 춘성군(春城郡, 지금 춘천)에 편입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조종현을 폐합한 후 1413년(태종 13)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고, 1525년(중종 20)에 가평현(嘉平縣)에서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1697년(숙종 23)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에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1888년(고종 25)에 춘성부(春城府)에 속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경기도로 환속되면서 포천군(抱川郡)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 가평군으로 독립하였다가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평면이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가평김씨는 1985년에는 총 16가구 93명, 2000년에는 총 2,460가구 7,52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2,444가구, 7,431명이 늘어났다. 1985년 조사과정에서 큰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현재 서울 2,333명, 부산 366명, 대구 306명, 인천 404명, 광주 108명, 대전 230명, 울산 57명, 경기 1,843명, 강원 224명, 충북 305명, 충남 334명, 전북 255명, 전남 264명, 경북 250명, 경남 238명, 제주 7명이다. 서울과 경기에 가장 많다.
한편 가평김씨의 본류(本流)인 강릉김씨(江陵金氏)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통일을 이룩한 무열왕 김춘추의 6세손이며 37대 선덕왕 때 각간으로 시중(신라 최고 관직)겸 병부령(군사 총책임자)을 지냈다.
신라 6만 군을 통솔하는 총사령탑으로 그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는 명주를 중심으로 양양·삼척·울진 등 영동 일대를 통치했다. 명주는 강릉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았다.
강릉김씨는 신라김씨 중 제일 처음 분적했다. 시조는 김종기, 김헌창, 김 신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중 둘째인 김헌창은 헌덕왕 때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장안’이라 하고 전라·충청도 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했다. 맏이 김종기의 손자 김 양은 서기 838년 민애왕인 김 명이 희강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패륜을 범하자 이에 분개, 청해진에서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제거했다. 그 뒤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세우고 정권을 왕실로 돌렸다.
강릉김씨는 셋째 김 신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가 명주군왕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했다.
그러나 그는 경주왕실에서 북쪽 20리 밖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신회의가 열리는 날 때마침 내리는 폭우로 알천(현 경주 부근의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군신들이“이는 천명이라”하여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원성왕이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고향인 강릉으로 은거했다. 그러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더욱 감복, 명주군 왕으로 봉하고 명주를 중심으로 한 익령(양양)·삼척·울진·평해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강릉김씨는 조선 명종-숙종 대에 8명의 판서(선팔판), 영조-정조 대에 또 8명의 판서(후팔판)를 배출한다. 현재 서울의 팔판동은 당시 강릉김씨의 판서들이 집단으로 살면서 생긴 이름이다.
한국인의 성씨 밴드페이지 & 유튜브 채널과 협업 중인 (사)한국뿌리문화보존회 / 한국성씨총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780여 개 성씨(본관)의 유래를 시리즈로 연재하여 소개합니다.
이 게시물은 서기 2005년 3월 30일자로 <한국성씨총연합회>에서 발행한 [한국성씨총감]에 수록된 내용을 이곳 한국인의 성씨 밴드페이지에 소개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2015년 통계청 실시 인구총조사(매 15년마다 실시):
-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 : 49,705,663명
- 5인 이상의 성씨 본관 : 532개
- 기타 : 91,10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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