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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청송 심(沈)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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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송 심(沈)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청송심씨
성씨 심(沈)
작품명 청송심씨의 얼
조각가 길홍랑
조형물번호 111

 

먼저 청송심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조형물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탑신은 청송심문의
기상을 표현한 것이죠. 주왕산에는 청송심씨 가문의 영기가 서려있고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러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가장은 우리의 후손들이 전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냈죠.문중의 사적을 기술하여 자신의 뿌리를 알고 숭조돈목 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청송심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경북 청송을 관향으로 삼은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조 고종 원종 년간에 출생한 문림랑공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삼고 오랜 세월동안 위로는 조상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손을 보살피면서 국가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중요한 문중으로 현달하였습니다.

문림랑공은 벼슬이 위위시승에 이르고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자 심연(沈淵)은 합문지후이고 차자 심성(沈晟)은 봉익대부입니다. 지후공의 아들 심용(沈龍)은 청화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슬하의 2남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 두 형제가 벌열의 문을 열었습니다. 봉익공은 2남을 두니 장자는 판서공 심연(沈漣)이고 차자는 상호군공 심경(沈卿)으로 그의 예손(裔孫)은
북한지역 고도에서 대대로 번연하니 세거지가 되었죠.

정안공 심덕부(沈德符)는 문무를 겸비하여 고려조에서 대명외교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청성부원군에 봉군되고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에 봉해지고 정종조에는 좌정승에 올라 경륜을 폈습니다. 정안공이 7남을 두니 1남은 심인봉(沈仁鳳)으로 도총제요 2남은 심의구(沈義龜)로 판사이고 3남은 심계년(沈繼年)으로 지성주사이죠.

4남은 심징(沈澄)으로 인수부윤이고 5남은 심온(沈溫)으로 영의정이며 세종국구로 시호가 안효(安孝)이죠. 6남은 심종(沈淙)으로 태조대왕의 2녀 경선공주를 맞아 부마도위 청원군이죠. 7남은 심정(沈泟)으로 동지총제입니다. 악은공 심원부(沈元符)는 전리판서의 지위에 올랐으나 고려조가 종언을 고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충신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으며 세 아들을 두니 1남은 심천윤(沈天潤)으로 영동정이죠.

2남은 심천주(沈天柱)로 현령이며 3남은 심천식(沈天湜)이죠. 그 외 자손들도 모두가 동량지재였고 계계승승 잠영세족이 되어 국가를 이끌었습니다. 청성백의 5남 심온(沈溫)의 딸이 세종대왕비 소헌왕후로 한때 부왕인 태종의 외척배격정책으로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왕후의 영민함과 공덕에 힘입어 위기에서 비켜날 수 있었으며 이후로 청송심씨는 동국 10대 벌족으로 번영하여 왔습니다.

인구수는 우리나라 256성씨 중 38위지만 명현달사를 수없이 배출하여 정계추요의 각신으로 혹은 노사숙유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죠. 13정승 2문형 3왕후 4부마에 정승 중에도 영의정이
9명으로 각 문중 중에서 으뜸이며 내리 3대 정승과 형제가 정승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대과급제가 196명이고 무과급제는 350여명 공신책록이 400여명이니 더 할 수 없는 영예이죠. 역경에 착한 일을 쌓은 가문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움이 있다했거니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도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송심씨의 인구는 240,768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KG94OIHfIrk?si=TnM8yB5TSbzDz-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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