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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의령 남(南)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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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의령남씨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의령 남씨
성씨 남(南)
작품명 화합(和合)과 번영(繁榮)
조각가 윤황식
조형물번호 101

먼저 의령남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의령 남(南)씨 선조들의 절의와 유서 깊은 역사의 특징을 잘 살려 세련된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곡선의 원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 속에 화합을 뜻하고 원안의 타원은 강한 생명력과 문중의 번영을 의미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의령남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남씨성(南氏姓)은 신라 경덕왕 14년 시조 영의공(英毅公) 민(敏)이 왕으로부터 남씨(南氏)로 사성받은 것이 시초입니다. 1200년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남씨(南氏)는 영양(英陽) , 의령(宜寧), 고성(固城) 3관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관조(貫祖)는 고려 통헌대부 추밀원직부사 남군보(南君甫)입니다. 의령남씨는 고려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죠.

고려 말에 자헌대부 참지문하부사를 지낸 곡은 남을진(乙珍)은 나라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신념으로 감악산 암굴에 들어가 단식 순절한 절신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조에는 충경공(忠景公) 남재(在)와 강무공(剛武公) 남은(誾) 형제는 조선개국에 훈1등의 공을 세워 중앙정계에 진출, 남재(在)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고, 남은(誾)은 증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이후 대대로 숱한 현신과 학자들이 배출되어 씨족의 위세를 높여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의령남씨를 조선조의 20대 명벌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정승 6명, 대제학 6명, 판서 22명, 문과급제자 140여명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남덕우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많은 인재가 정·재계, 법조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의령남씨는 지금 전국에 20여만 명이 산재해 살고 있으며 의령남씨의 본산(本山)인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00번지에는 관조 의령군(宜寧君)의 묘소와 재실 비각 관리사가 있으며 매년 춘추로 전국의 자손들이 모여서 시제를 드리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의령남씨의 인구는 129,729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GHn0xAFhw2xiqZ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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