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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안동김씨(安東金氏)(신)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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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安東金氏)(신)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로서 서기 930(고려 태조 13)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 아부(三重大匡太師亞父)의 벼슬에 이르렀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견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榮可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로부터 문호(門戶)를 개방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부정(副正) 습돈(習敦)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계행(係行)이 조선(漕船) 성종(成宗) 때 대사간(大司諫)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이 되어 세도가문(勢道家門)의 지위를 굳혔다.

 

계행(係行)의 증손(曾孫) ()은 중종(中宗)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했으며, 그의 아우 번()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다.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長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일찍이 석학(碩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尙容)은 인조(仁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이르기를 네가 만일 살거던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 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孫子) 수전(壽全)이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옷을 잡아 당기며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며 가지 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상용의 아우 상헌(尙憲)은 백부(伯父)인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느날 조회때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나라에서 금한 대분투(大分套 :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를 신었으며 부자(富者) 장현(張炫)은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 : 장연 끝에 덧 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을 하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상헌이 옥에 가두자 시량의 처자가 영의정(領議政) 오윤겸(吳允謙)에게 가서 모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 하며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마는 끝내 구해주지 못했으며,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고 한다.

 

상용(尙容)의 아들 광현(光炫)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과거를 단념햇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 천거되어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버지 상용(尙容)의 유지를 받들어 청()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효종(孝宗) 때 생원(生員)으로 형조(刑曹)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낸 수증(壽增)은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아우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에 은거(隱居)했으며, 1655(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한 수흥(壽興)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 1660(현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성(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設)을 주장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肅宗 때 영의정(領議政),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昌集)의 아들 제겸(濟謙)이 숙부(叔父) 창흡(昌翕)에게 수학하고 숙종말(肅宗末)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손자(孫子) 이소(이소)가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玄孫)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명순(明淳 : 창집의 현손)의 아들 중 홍근(弘根)은 헌종(憲宗) 때 공조(工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철종실록(哲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도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 인순의 아들로 이순에게 출계)언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보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孫子) 원행(元行)이 왕세손(王世孫)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를 오려 사임하고 누차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한 후 학문에 전력했다.

특히 그는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다.

 

그의 아들 이안(履安)도 아버지의 학문(學問)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었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學者)로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앞장섰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인순(麟淳)의 아들 수근(壽根)은 헌종(憲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이르렀으며, 수근(壽根)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高宗) 때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다.

 

병국(炳國)은 철종(哲宗) 때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고종(高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文章)이 뛰어나서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여한10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 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고, 양행(亮行 : 신겸의 아들)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선천 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詩人)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친 시구(詩句)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명규(明圭),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종한(宗漢), 시종원경(侍從院卿) 병익(炳翊)과 독립투사로 31운동에 참가했던 가진(嘉鎭)인 뛰어났다.

 

개화혁명(開化革命)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음독자결한 석진(奭鎭), 유림의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피리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던 복한(福漢), 민종식(閔宗植)의 의병(義兵)에 가담했던 덕진(德鎭),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흑룡강(黑龍江)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71

 

안동김씨(安東金氏)(신)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로서 서기 930년(고려 태조 13)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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