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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해평 길(吉)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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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해평 길(吉)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을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해평 길씨
성씨 길(吉)
작품명
조각가 길 홍 랑
조형물번호 35

먼저 해평길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고구려 대에 정착한 팔학사의 역사성과 길씨 가문의 상징인 가문, 가헌, 종규, 가범, 가훈의 뜻과 고려충신 야은 길재(吉再)선생의 불사이군, 충의정신, 삼은(三 隱)과 도학 사림파의 비조(鼻祖)로써 백세청풍 지주중류(砥柱中流) 비의 선비정신, 민족정기의 등불로서 후세 영원불멸의 사표를 상징한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해평길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멀리 당나라에서 예문에 밝은 8학사가 초빙되어 왔는데, 길씨의 먼 조상인 길당(吉塘)은 그 중 한분으로, 당나라에서 열경(列卿) 벼슬을 지내신 분으로서 경상도 선산 해평백(海平伯)을 제수받고, 정당문학 벼슬과 문정(文貞) 시호를 받아 본관을 임지명에 연유 해평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후 사적이 소실되어 족보상 시조는 성균 생원인 길시우(時遇)가 되고, 그 증손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이 중시조가 되어 항렬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야은은 고려말 선산에서 태어나서 학덕을 도야한 후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나라의 운명이기 기울자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부귀공명을 마다하고 고향 금오산에 돌아와 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죠.

원근(遠近)의 후학들이 그 학행을 흠모하여 모여드니 이후 사림파(士林派)의 형성을 보게 되고, 마침내 조선 도학의 적통(嫡統)을 이은 사림의 비조로서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와 같은 훌륭한 학자들로 하여금 도학의 학통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충의는 세종원년(1419) 67세로 돌아간 전후부터 크게 숭모 현창되었습니다.

바로 세종대왕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에 올려 신자(臣子)의 귀감을 삼았으며, 중종 이후 포은과 함께 나라에서 묘지수호제사를 계속하고, 숙종 어필시(御筆詩)등 역대왕의 찬시와 갖가지 자손 후대의 은전이 베풀어졌죠.

이에 선생은 포은(鄭夢周) 목은(李穡)과 더불어 조선 유교사회의 전통적 삼은(三隱)으로 상징화되고 각처에 서원과 삼은각(三隱閣), 백세청풍비 지주중류비 등이 세워져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서 추앙되고 있습니다. 「고려 5백년 교화와 조선조 억만년 강상(綱常)의 근본이 한몸에 터 잡힌」 야은 선생의 유학사상 위상은 참으로 높고 컷습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높은 기상을 이어받아 어떠한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 말며, 오직 외로움으로 선조들의 은덕에 보답할 것입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해평길씨는 22,187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HqikECOCegFe2_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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